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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연극 ‘히어(Hir)’] 가족·성·사회 속 ‘정상성’, 블랙코미디로 조롱하다

힘 잃은 가부장 전복한 ‘가모장’, 성전환한 트랜스젠더 등 독특한 구성

규정 거부하는 인물 통해 정상성 잣대로 폭력 가하는 사회 통념 비판

연극 ‘히어’의 한 장면. 사진 제공=황선하 사진가




‘정상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여러 가지 유무형의 규범들은 과연 정말 정상일까. 연극 ‘히어(Hir)’는 가장 정상적인 가족 형태로 꼽히는 4인 중산층 가정의 뒤틀린 모습을 조명하면서, 갖가지 규범의 바탕에 깔린 ‘정상성’의 이데올로기를 노골적으로 조롱한다. 연극은 내내 대담하고 파격적인 전개를 통해 가족들 사이 지켜야 할 도리, 성적 정체성과 성 역할, 집의 역할, 심지어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일 등등 우리가 당위라고 여겼던 것들에 저항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블랙코미디 위에 얹어놓음으로써 기묘한 분위기를 완성한다.

이야기는 미국의 한 중산층 4인 가족을 배경으로, 첫째 아들 아이작이 해병대에 입대한 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됐다가 3년만에 집에 돌아오면서 시작한다. 돌아온 집의 모습은 군대에서 생각했던 모습이 아니다. 아버지 아놀드는 뇌졸중에 걸려 거동을 제대로 못하는 가운데 내팽개쳐져 있으며, 어머니 페이지는 ‘가모장’으로서 집안에서 권력을 잡고 있었다. 동생은 성전환을 한 후 이름을 맥스로 바꿨다. 아이작은 이 모든 게 이상하고 어색한 탓에 집을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려놓으려 하고, 엄마와 동생과 마찰을 빚는다.

연극 ‘히어’의 한 장면. 사진 제공=황선하 사진가


연극이 시작되면 온통 어질러진 집의 모습을 한 무대가 관객을 맞이한다. 빨래들은 건조대에 쌓인 채 널브러져 있고, 주방 개수대에는 설거지하지 않은 그릇이 가득하다. 집 구석에서 반짝이는 전자 벽시계는 고장 난 채 돌아간다. 보는 사람에 따라 무대부터 불편할 만하다.

그리고 극이 전개될수록 더 파격적이고, 블랙코미디의 기조에도 불구하고 묵직하다.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가부장이던 아놀드는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힘을 잃었고, 조롱당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페이지는 가정의 권력을 쥐고는 아놀드의 과거 폭력에 보복하는 학대를 일삼고, 아놀드가 가정에서 해 온 것과 반대로 행동한다. 맥스는 남녀 이분법적 젠더 구분을 거부하는 이른바 ‘논바이너리(non-binary)’로, 스스로를 ‘그(him)’ ‘그녀(her)’가 아닌 새로운 대명사인 ‘히어(hir)’로 부르라고 요구한다. 연극의 제목도 여기에서 따온 것으로, 정상성 이데올로기와 통념을 거부한다는 메시지를 확고히 했다.



연극 ‘히어’의 한 장면. 사진 제공=황선하 사진가


‘히어’는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정상적인 규범들이 사실은 부실한 근거와 허망한 토대 위에 세워진 허수아비일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네 사람의 집은 과거 아놀드가 휘두른 폭력에도 벽체가 부서지는 힘 없는 건물이고, 집이 지어진 곳 자체가 영속성을 보장하기 어려운 쓰레기 매립지다. 그것이라도 지키고 싶다는 아이작과 모든 걸 전복하고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페이지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두 사람 모두 아놀드의 폭력적 모습을 닮아가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파격적 이야기들이 으레 그러하듯 파국으로 끌려간다.

작품은 이러한 이야기를 이끌기 위해 막대한 양의 대사와 블랙코미디의 분위기를 이용한다. 블랙코미디는 극의 정체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무거운 분위기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은 쓴웃음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군대의 집체교육, 그림자 인형극, 배우들의 슬로모션 연기 같은 다양한 형식도 눈길을 끈다. 2014년 미국의 아티스트 테일러 맥이 초연한 작품으로, 국내에서는 박정희 연출가를 통해 이번에 처음 무대에 올랐다. 29일까지 서울 더줌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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