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당권 주자인 김기현 의원이 최근 입법을 추진하고 있는 여성의 민방위 훈련 참여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대해 야당 및 여성 단체는 물론 여당 내 일각에서도 성 대결, 세대 갈등이 초래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기왕 이슈화된 김에 민방위제도에 대한 전반적 개선점을 찾아 보강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적지 않다. 전 세계적으로 안보·재난 리스크가 커지는 와중에 국민들의 생존성을 높여야 할 한국의 민방위 교육은 갈수록 축소되고 필요 물자와 인프라는 태부족하기 때문이다.
행정 및 국방 당국에 따르면 우리나라 민방위대는 병역제도의 한 종류로 도입됐으나 민방위 대원이 대응해야 하는 위기 상황은 보다 광범위해졌다. 특히 국방 뿐 아니라 지진·해일과 같은 자연재해 등의 민간 부문 리스크에 대비하기 위한 측면이 민방위제도에서 한층 강조돼왔다. 민방위기본법에서 민방위사태의 정의가 복잡해진 것만 봐도 이 같은 추세를 알 수 있다. 1975년 법 제정 당시 민방위사태는 ‘적의 침공이나 전국 또는 일부 지방의 안녕질서를 위태롭게 할 재난’으로 한정됐다. 반면 현재는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사태, 적의 침투·도발에 따른 통합 방위 사태, 행정안전부 장관의 재난 사태 선포 상황, 중앙대책본부장의 특별재난지역 선포 상황 등으로 다변화됐다.
◇재난에 맞설 대원 수 급감
이처럼 대응해야 할 상황이 확대됐음에도 정작 인력은 2000년대부터 급격히 줄었다. 민방위대가 공식 창설된 1975년 9월 당시 397만 명이던 인원은 2000년까지 점증해 751만 명에 이르렀으나 이후 급감해 2022년도에는 반 토막에도 미치지 못하는 342만 명에 그쳤다. 일각에서는 총인구수가 줄었으므로 민방위 대원 수의 감소는 당연하다는 평가도 내놓는다. 그러나 인구수가 아닌 인구 비율로 봐도 인력 부족 현상이 확연하다는 점에서 이 같은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국내 인구수 대비 민방위 대원 수 비율은 2013년 7.5%에서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줄어 2022년에는 6.6%까지 낮아졌다. 민방위 분야의 ‘인력 절벽’ 현상이 본격화된 것이다.
이 같은 감소세는 저출산 등의 탓도 있지만 더 직접적인 원인은 민방위 편성 연령을 대폭 축소한 포퓰리즘 정책에 있다. 1975년 민방위대 출범 당시 만 17~50세 남성이던 대원 편성 범위는 1989년에 하한 연령이 만 20세로 상향 조정되더니 김대중(DJ),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각각 상한 연령을 대폭 낮추는 입법이 실시되면서 2001년에는 45세, 2007년에는 40세로 편입 연령 상한이 떨어졌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전직 당국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여당이 주도해 민방위 상한 연령을 크게 낮추는 정책을 추진했다”며 “당시 민생 등을 고려한 측면도 있었겠지만 대선을 앞두고 중년층의 표심을 얻으려는 정치적 결정이라는 평가도 있었다”고 전했다.
◇교육·물자 측면에서도 빈틈
민방위제도는 질적 측면에서도 후퇴하고 있다. 인력만 줄어든 게 아니라 교육 시간 등도 급감한 것이다. 1975년 한 해 4시간이던 민방위 교육 시간은 1977년 30시간까지 늘어 정점에 이른 뒤 1978년 20시간, 1982년 10시간, 1988년 8시간으로 줄더니 2007년에는 편성 연차에 따라 2시간·4시간 수준까지 떨어졌다. 지난해부터는 5년 차 이상의 민방위 대원은 아예 연간 1시간만 교육을 받으면 된다.
이에 대해 한 군 당국자는 “남성들 대부분이 병역을 마치고 예비군까지 경험한 상태여서 어지간한 전시·재난 대비 요령은 숙달돼 있어 민방위 교육 시간이 감소해도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다만 줄어든 시간 동안 집중도 있게 교육이 이뤄져야 하는데 다소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유사시 대응 물자 부족 등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정책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특히 북한이 지난해 선제 핵 타격 방침을 법으로 못 박고 전술핵무기 등의 실전 배치를 가속화하려 하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인프라·물자 확충이 시급해졌지만 입법·예산 모두 불발됐다. 2017년 당시 조경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핵 및 화생방전에 대비하기 위한 방독면·요오드화칼륨 등의 지방자치단체 비축량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해당 물자를 지자체들이 민방위 대비 물자로 비축하도록 민방위기본법을 개정하는 방안이 추진됐으나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에서 제대로 된 대체 토론 한 번 없이 법안이 폐기됐다. 그에 앞서 2016년 정부가 접경지 주민들이 적의 일시적 도발 등으로 피해를 입을 경우 받을 수 있는 구호 조치의 요건을 민방위사태 이외의 경우로 완화하고 신속 정확한 민방위 경보 발령 체계 표준화를 추진하기 위한 법안도 국회에 제출됐지만 아예 소관 상임위에 심사 한 번 이뤄지지 않고 폐기됐다. 여야는 민방위 관련 지급 비용 인상 등과 같이 당장 표심을 살 수 있는 선심성 입법안 등을 내놓는 데 집중하는 분위기다.
◇이대남만 짊어진 재난 구호 의무
민방위 체계가 이처럼 인적·물적·제도적으로 빈틈을 보이고 있지만 인기 없는 제도이다 보나 정부·여야 모두 전면적인 제도 수술 기피하고 있다. 특히 신생아 남녀 출산 비율이 역전돼 ‘여초’ 현상이 가속화됨에 따라 인력 감소세는 더욱 가팔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대한민국에서 민방위 편성 의무는 남성만 지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20~40대에 국한돼 있기 때문이다.
민방위제도를 도입한 해외 주요 국가 중 남성에게만 민방위 편성을 의무화한 곳은 스위스뿐이다. 그나마 스위스는 병역을 마친 남성에게는 민방위 편성 의무를 면제해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만·이스라엘·스웨덴·덴마크 등은 남녀를 의무적으로 민방위 편입 대상에 포함시켜놓았다. 이들 국가는 연령 하한선을 10대 청소년(16세)으로 정해놓았고 국가에 따라 60대나 70대 노인들도 포함시키고 있어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의무제가 아닌 지원제로 민방위를 운용하는 미국·영국·독일·프랑스·싱가포르 역시 남녀 차별을 두지 않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전했다.
이에 대해 군 관계자는 “우리나라에서 민방위제도는 남성들의 병역제도와 연계된 연장선상에서 탄생하다 보니 병역 의무를 지지 않는 여성·청소년·노인 등은 자연스럽게 민방위 편성 대상에서 제외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이제 민방위 교육은 전시 대비 훈련 수준이 아니라 평시에 각종 재난·재해에 대응해 스스로를 지키고 타인을 구난하는 민간 차원의 제도로 확장된 만큼 연령과 성별 제한을 점진적으로 풀어 전 국민이 재난에 실질적으로 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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