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가 자욱해서 앞이 안 보일 정도라 아내는 휴대폰도 못 챙기고 슬리퍼만 신은 채 집 밖으로 뛰쳐나왔어요.”
강원 강릉시 안현동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남상훈 씨는 11일 오전 9시께 메케한 냄새에 놀라 밖으로 나왔다가 길 건너편까지 번진 산불에 놀라 혼비백산하며 대피했다.
강릉 난곡동 인근 야산에서 11일 발생한 산불이 태풍급 강풍을 타고 민가와 해안가 일대를 덮쳐 큰 피해가 발생했다. 이 산불로 주택 59채, 펜션 34채, 호텔 3곳, 상가 2곳, 차량 1대, 교회시설 1곳, 문화재 1곳 등 총 101개소가 전소되거나 일부가 타고 주민 557명이 대피했다. 이 과정에서 80대 남성 1명이 숨지고 3명이 화상을 입었으며, 1명이 손가락에 골절상을 입고 12명이 연기를 마시는 등 사상자 17명이 발생했다. 주불은 천둥·번개를 동반한 거센 소나기가 내리면서 이날 오후 4시 30분을 기해 오전 8시 22분께 불이 발생한 지 정확히 8시간 8분 만에 진화됐다.
산불이 강풍을 타고 번지면서 사찰과 정자 일부가 불에 타는 등 문화재 피해도 발생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날 강원도 유형문화재인 ‘강릉 방해정(放海亭)’ 일부가 소실됐다. 경포호 주변에 있는 작은 정자인 상영정(觴詠亭)과 인월사는 불에 타 전소된 것으로 파악됐다. 한때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인 경포대 근처까지 불길이 번졌지만 다행히 큰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산림청과 소방 당국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 24분쯤 강릉시 운정동 선교장 인근에서 산불 신고가 접수됐다. 산림청은 강릉시 연곡면에서 11일 오전 8시 22분께 발생한 산불은 강풍에 부러진 소나무가 건드린 전깃줄이 끊어지면서 불꽃이 튀어 산불로 확산한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특히 강풍이 불면서 진화 작업 초기에 헬기가 동원되지 못하면서 주불 진화가 지체됐다. 봄철 태풍급 강풍으로 불리는 양간지풍은 ‘양양과 고성 간성 사이에서 국지적으로 부는 강한 바람’으로 불똥이 날아가는 ‘비화’ 현상을 초래해 헬기 작전을 어렵게 만든다.
정부는 강풍경보와 건조경보가 동시에 발효된 상황에서 발생한 산불이 강풍을 타고 빠르게 확산하자 소방청과 산림청을 중심으로 총력 대응에 나섰다. 윤석열 대통령도 이날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장비와 인력을 신속히 투입해 조기 진화에 총력을 기울여달라”고 지시했다.
소방청은 이날 오전 9시 42분과 9시 43분에 각각 전국 소방동원령 2호와 최고 대응 수위인 소방 대응 3단계를 발령했다. 소방 대응 3단계가 발령된 것은 올해 들어 처음이다. 이에 따라 소방력 725명과 소방 장비 275대, 울산 대용량포 방사 시스템 등 가용 가능한 자원이 모두 투입됐다. 산림청 역시 이날 오전 10시 30분을 기해 최고 대응 수위인 ‘산불 3단계’로 올렸다. 이날 산불 진화 작업에 동원된 자원은 진화 인력 2787명, 산불 진화 장비 403대가 포함됐다. 산림 당국은 이날 오후 들어 강릉 일대에 바람이 잦아들자 초대형 헬기 1대 등 헬기 4대를 진압 작전에 활용해 주불 진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산림 당국은 주불 진화가 완료된 만큼 피해 면적과 시설물 피해 상황을 정밀 점검하는 한편 정확한 화재 원인을 조사할 계획이다. 정치권에서는 강릉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됐다. 김진태 강원지사는 “마지막까지 불을 다 진압하고 재산 피해를 더 확실하게 조사해서 특별재난지역에 포함되도록 중앙정부에 건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