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60조 원이던 국가 채무(D1)는 5년 만에 400조 원 넘게 급증해 지난해 1067조 원에 달했다. 게다가 올 들어 세수 급감 속에 지출이 급증하면서 나라 살림에 비상등이 켜졌다. 이런데도 여야 정치권은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재정을 악화시키는 퍼주기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다.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인 이철인 한국재정학회장은 18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적게 걷어 많이 쓰는 식의 무분별한 돈 풀기는 공공을 내세운 ‘폰지 사기’나 다름없다”면서 “재정 준칙의 방어막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학회장은 또 “이제는 재정 만능주의에서 벗어나 나라 경제의 마지막 보루인 재정 본연의 기능을 되찾아야 한다”면서 “과학기술 경쟁력 제고와 고급 인재 육성에 예산을 집중 투입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지난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부채를 합친 국가 채무가 처음으로 1000조 원을 넘어섰다.
△3년 연속 매년 100조 원 안팎의 재정 적자를 기록한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생산 가능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저출산·고령화 상황에서 100조 원은 우리 경제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다. 미래 세대의 입장에서는 단지 부담을 떠안는 단계를 넘어 감당 불가능한 수준이다. 이러다가는 진짜 재정을 써야 할 때 쓸 돈이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정치권이 앞장서 재정 규율의 중요성을 무너뜨리고 있어 매우 우려스럽다.
-올해에는 세수 부족 사태마저 우려되고 있는데.
△올 들어 부가가치세 등에서 세수 감소가 발생하고 있으며 법인세도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경기가 호황 국면으로 바뀔 때 초과 세수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주요국들은 코로나19 이후 재정 건전화로 방향을 틀었는데 우리 정치권만 역주행하고 있다. 지금은 재정 적자를 줄여나가는 데 주력해야 할 때다.
-우리나라의 국가 채무 증가 속도는 유례없이 빠른 편이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중기 재정 전망에서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이 2025년 60%에 근접하고 2030년에는 80% 수준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이렇게 되면 미래 세대는 세금 30%와 사회보험료 30%를 합해 수입의 60%를 내놓아야 한다. 미래 세대를 착취한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경상수지 적자 압력이 발생하는 와중에 재정 적자마저 쌓이게 되면 미국처럼 ‘쌍둥이 적자’가 고착화할 것이다. 만일 반도체·자동차 등 주력 산업도 흔들리면 대외 신인도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이는 자본시장에 충격을 주고 이자율 급등과 자금 이탈을 초래할 수 있다. 이렇게 20~30년 정도 흐르면 ‘경제 붕괴’라는 심각한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선진국에 비해 아직 국가 부채비율이 낮은 편이라고 주장하는데.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에 비해 부채비율이 낮아 재정 여력이 충분하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선진국은 우리처럼 심각한 인구 절벽에 시달리지 않았거나 고령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다음에 국가 부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 대부분의 국가들은 국가 채무 비율 50% 수준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책을 내놓았다.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재정 운용에서 긴축 기조로 바꾼 대표적인 국가다. 반면 스페인·프랑스 등은 정책 실기로 과도하게 높은 재정 부담을 떠안고 있다. 이 국가들은 그나마 유럽 통화 공동체의 큰 틀에서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에 버티고 있다.
-정부가 670조 원 안팎의 내년 예산을 편성하면서 긴축 예산을 약속했는데.
△10년 전 예산 규모인 340조 원보다 거의 두 배가량 급증해 긴축 예산이라고 부르기도 어색할 정도다. 지난해에는 재량적 지출에서 20조 원가량 줄였으나 100조 원 이상의 재정 적자를 기록했다. 이제라도 지출 축소에 대한 정부 차원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세수 여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재정 악화가 경제 위기로 전이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내년 예산안 편성에서는 긴축 재정 쪽으로 가는 모습을 국민에게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도록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재정 투입의 우선순위를 정한다면.
△지금은 침체 징후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만큼 급한 불을 끌 수 있도록 위기 대응 예산에 집중해야 한다. 긴급 생계비나 구조 조정 지원은 물론 자산 거품 붕괴에 따른 은행권 및 자영업자 부실에도 적극 대응해야 한다. 정파적 관점에서 지출되는 예산을 줄이고 과학기술·연구개발(R&D) 등 생산적이고 효용성이 높은 곳에 재원을 집중 투입해야 한다. 이를 통해 유동성 문제나 물가 상승, 금리 인상 등에 따른 경제활동 위축에 적절히 대응해야 한다. 교육 분야에서도 한쪽에서는 재원이 남아도는데 정작 중요한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예산은 부족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조세 부담을 높여 재원을 조달하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재정지출을 통제하려는 노력을 희석시킬 수 있다. 일단 지출을 줄이고 재정 적자를 없애는 노력에 나서야 한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선심성 정책에 대한 우려가 높은데.
△정치권이 양곡관리법 등을 놓고 갈등을 겪고 있는 것도 심각한 재정 건전성 위기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재정 규율이 약화되는 등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는데도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데는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여야 모두 불필요한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하지 않겠다는 각성이 필요하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세수는 줄어들고 복지 수요는 급팽창하는데 여야가 예산 퍼주기 경쟁을 벌이면 머지않아 나라 곳간이 바닥나고 미래 세대에 큰 부담을 안기게 된다.
-거대 야당에서는 기본금융 같은 ‘기본 시리즈’를 주요 정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최약자의 후생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사회에서는 채택 가능한 정책이다. 하지만 최약자를 포함해 사회 전반의 후생을 고려한다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처럼 ‘기본’을 강조하는 정책은 재정지출 증가와 경제활동 위축을 초래하게 된다. 추가적 재원 소요도 부담스러운 요인일 것이다. 형평성을 강조하는 유럽 복지국가를 포함해 많은 나라가 이 제도를 채택하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봐야 한다. 복지 의존성이나 수혜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등 다양한 요인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대부분의 국가는 기본소득보다는 최저 생계비와 실제 소득 사이의 차액을 보조하는 ‘부(負)의 소득세제’, 근로장려세제(EITC) 등을 통해 저소득층을 지원하고 있다.
-벌써 정치권에서는 추가경정예산 편성 논의가 나오고 있는데.
△추경도 자주 하다 보니 당연시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이는 미래를 내다보지 않고 후유증에 대한 고려조차 하지 않은 미봉책이다. 적자도 모자라 추경을 반복할 정도의 재정 운용이라면 재정 건전성을 아예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되면 사회 안전망 구축이나 연금 지급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재정 준칙 법제화가 국회에 발목이 잡혀 있다.
△관리재정수지 적자 폭을 일정 수준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재정 준칙 법제화는 이미 많은 국가가 도입한 만큼 더 이상 미루면 안 된다. 수지 균형뿐 아니라 지출 규모에 대한 제약도 이뤄지면 재정 건전성을 높일 수 있다. 우선순위에 입각한 효과적 재정 운용이 가능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 관점의 방만한 재정 운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적게 걷어 많이 쓰는 재정 운용은 파국으로 이끄는 길이자 공공을 내세운 ‘폰지 사기’ 행태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실제 재정 준칙을 도입한 나라들은 나랏빚 증가 속도가 둔화되고 국채 리스크가 줄어든다는 통계도 나와 있다.
-국회에서 예비 타당성 조사의 면제 기준 완화를 추진하고 있는데.
△예비 타당성 조사는 방만한 사업 남발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이마저 완화하는 것은 재정 건전화와 더 멀어지겠다는 아주 위험한 시그널이다. 정작 중요한 재정 준칙을 쏙 빼고 선심 사업에 나서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조세정책의 큰 틀을 어떤 방향으로 설정하는 게 바람직한가.
△세율이 장기적으로 너무 높았던 나라들은 대부분 활력이 사라지고 경제적 활동 자체가 위축된다. 유럽의 경우 뛰어난 연구 실적이 나와도 실용화에 이르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유럽 연구자들은 과도한 세금이 부담스러워 미국 등 다른 나라로 탈출하고 있다. 이제는 재정 만능주의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앞으로는 좌우 진영 논리보다는 세대 간의 문제가 더 크게 불거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가 채무 비율 50% 수준인 지금이라도 경제 활력을 되찾고 미래 세대까지 포용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위기에 직면한 한국 경제의 돌파구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반도체·자동차·휴대폰 등 주력 산업 전반에 걸쳐 쉽게 이익을 올리기 어려운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무엇보다 재정 만능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 첫걸음이다. 더 이상 재정을 성장, 분배, 사회 개혁 등의 수단으로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 혁신과 새로운 생산구조,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일자리를 창출해내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재정은 이러한 경쟁과 혁신의 환경을 조성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 사회복지도 근로·생산 활동과 지나치게 괴리되지 않도록 정비돼야 한다.
◆He is…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인창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연구원과 건국대·성균관대 교수를 거쳐 2009년부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 서울대 경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 4월부터 한국재정학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