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2월의 어느 날. 오전 미팅에 나서기 위해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 문을 열려다 내부를 보니 차량 내 콘솔박스에 있었던 서류들과 잡동사니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있었다. ‘언제 저것들을 꺼내놓았나’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수석 뒤편의 창문이 깨져 있었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악명 높은 차량 털이 범죄에 당한 순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실리콘밸리의 지하 주차장은 통신이 터지지 않는다. 올라가서 보험사에 통화해봤지만 가장 빠른 출동 서비스는 열흘 뒤였다. 대안이 없었다. 그렇게 30㎞가 넘는 거리를 창유리가 깨진 채 달려야 했다.
샌프란시스코와 실리콘밸리 일대의 101 고속도로를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유리창이 깨진 채로 혹은 임시방편으로 창문에 비닐만 붙인 채 달리고 있는 차량을 종종 만난다. ‘무슨 생각으로 유리창이 깨진 채 달리는 걸까’. 겪어보니 복합적인 요인이 있다. 차량 털이 범죄가 많다. 그렇다 보니 보험사가 연결해주는 업체는 늘 만원이다. 유리 재고 부족, 인력 부족 등의 이유로 창유리를 일주일 내로 교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자동차 보험사도 늘어나는 비용으로 인해 캘리포니아주 영업에 백기를 든다. 최대 자동차 보험사 가이코도 캘리포니아주에 신규 영업 조직을 없애며 영업 종료 수순을 밟고 있다.
임시방편으로 차량 정비 업체에서 유리창에 덧대 준 비닐을 붙인 채로 열흘을 기다렸다. 그간 추가 범죄 가능성에 노심초사하면서 ‘깨진 유리창 이론’을 실감했다. 깨진 유리창 이론은 깨진 유리창 하나를 그냥 두면 처음에는 사소한 균열이지만 이를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한다는 내용을 말한다. 차량 범죄는 끝이 없었고 타이어를 빼가는 범죄도 많아 이미 허점이 노출된 차량은 취약했다. 이 이론은 1990년대에 미국 뉴욕시가 뉴욕 지하철의 높은 범죄율을 줄이기 위해 고심하던 과정에서 활용해 지하철의 ‘깨진 유리창’이 될 만한 요소들을 없애고 유지 관리해 범죄율을 절반 가까이 줄이는 데 기여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많은 이들이 “실리콘밸리가 예전 같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기업과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로 살인적인 물가가 꼽혔지만 최근에는 치안 우려도 비등한 수준으로 올라왔다. 실리콘밸리 인구는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순감소한 이후 2년 연속 감소세를 밟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깨진 유리창’은 실리콘밸리 엑소더스 신드롬 그 자체일 수 있다. 스타트업 생태계로서의 명성과 강점을 잃고 있다는 인식이 추가적인 이탈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최근 샌프란시스코 일대에 희망이 관측된다. 샌프란시스코의 샌드힐로드로 자리 잡은 사우스파크 일대가 대표적이다. 한사우스파크라는 원통 형태의 작은 공원을 중심으로 마주보는 건물들의 상당수가 벤처캐피털(VC)이 둥지를 튼 곳이다. 레드포인트벤처스를 비롯해 샤스타벤처스·노웨스트벤처파트너스 등 20곳에 달하는 VC들이 자리를 잡은 뒤 공원에서 오가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투자 정보를 교환하는 안전한 곳으로 변모했다. 이곳에서 차로 10분가량 떨어진 미션 지구와 헤이즈밸리 일대는 챗GPT 개발사인 오픈AI가 생성형 인공지능(AI) 열풍을 일으키면서 AI스타트업들이 주변에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헤이즈 밸리는 이전 만해도 주목받지 못했던 곳이었으나 이제는 ‘대뇌 밸리(Cerebral Valley)’라는 애칭을 얻으면서 부흥기를 맞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 최대 액셀러레이터인 와이콤비네이터(YC)가 최근 진행한 ‘데모데이 2023 윈터’에서는 참가 기업의 80% 이상이 샌프란시스코와 실리콘밸리에 주소를 둔 것으로 나타났다. 희망적인 소식이다. 이는 전년(53%) 대비 대폭 늘어난 비중이다. 결국 다시 스타트업이 모이는 생태계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핵심적인 정체성을 찾아내고 적절한 흐름을 만들어내는 게 필수다. 실리콘밸리도 거대 생태계로서의 후광 대신 새로운 창을 달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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