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아직 깊은 잠속에 빠져 있을 때 골프장의 하루는 시작된다. 보통 첫 팀은 일출과 거의 동시에 출발하는데 그러자면 코스는 이미 그 전에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밤사이 티잉 구역, 벙커, 그린 등지에 이상은 없었는지 확인하고 문제점이 발견되면 즉시 해결해야 한다.
엘리트 수준의 골퍼들이 겨루는 대회를 치른다면 그 준비 과정은 더욱 철저할 수밖에 없다. 플레이 재미보다는 공정한 테스트나 도전이 진행될 수 있도록 코스 길이, 난도, 홀 위치 등을 다양하게 조절해야 한다. 페널티 구역의 선 하나를 긋는 데에도 플레이 속도나 구제 방법 등을 감안해야 한다. 이렇듯 원활하고 공정한 플레이를 위해 날씨, 경기 수준, 참가 인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코스 컨디션을 설정하는 걸 ‘코스 셋업’이라고 한다. 코스를 어떻게 셋업 하느냐에 따라 ‘버디 파티’가 벌어질 수도 있고,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
코스 셋업을 알고 나면 골프 경기를 보는 재미도 더해진다. 올해 대한골프협회(KGA) 주관 첫 대회인 제1회 고창고인돌배 아마추어골프선수권 대회가 열렸던 전북 고창의 고창 컨트리클럽을 1박2일 일정으로 찾았다.
새벽 찬 공기와 따뜻한 국밥 한 그릇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컴컴한 밖과 달리 훤한 불이 켜진 클럽하우스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함께 코스에 나가 셋업 실무에 대해 설명해 줄 김경수 KGA 경기위원의 국밥 그릇은 벌써 반쯤이나 비어 있었다. 기자에게도 곧 나가야 하니 얼른 한 그릇 먹으라고 했다.
김 위원은 경제일간지에서 오랜 기간 골프담당 기자로 일한 뒤 현재 KGA 경기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경기위원은 크게 존(Zone) 레프리, 로버(Rover) 레프리, 치프(Chief) 레프리로 나뉜다. 존 레프리는 2~3개 홀을 맡아 룰 판정을 하고, 경험이 풍부한 로버 레프리는 주로 홀 사이를 오가며 원활한 플레이 흐름을 돕는다. 치프 레프리는 경기위원장이다. 김경수 위원은 로버 레프리로 뛰고 있다.
이상고온으로 벚꽃이 일찌감치 만개한 봄이었지만 새벽 찬 공기는 옷 속을 파고들었다. 경기위원들의 옷차림새는 여전히 겨울이었다. 김 위원은 “우리는 항상 새벽별 보며 나가고, 달이 뜰 때서야 들어온다”며 “무엇보다 보온에 신경 써야 한다”고 했다.
코스 셋업의 큰 틀은 대회를 앞두고 이뤄지고, 대회가 시작되면 매 라운드 티잉 구역이나 홀 위치 등을 조금씩 변경해가며 난도를 조절한다. 이날은 남자부 이틀째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다. 경기위원들은 2인 1조 인·아웃으로 나눠 코스를 점검했다. 기자가 참관하는 김경수-강신구 위원 조는 아웃 코스를 맡았다.
안개는 끼어도 일은 멈추지 않는다
1번 홀 티잉 구역에 선 김 위원은 페어웨이를 바라보더니 안개를 살짝 걱정했다. “일반 영업을 하는 골프장이야 이 정도면 출발을 시키겠지만 대회 때는 티샷이 떨어지는 지점이 보여야 돼요. 첫 조 출발 때까지 안개가 걷히지 않으면 경기 시작이 늦춰질 수밖에 없어요.”
안개가 끼었더라도 당일 코스 셋업은 최대한 빨리 마쳐야 한다. 1번 홀 티잉 구역은 전날보다 1m 뒤로 옮기기로 했다. 새로운 지점을 잡은 뒤 가로 6m 폭을 재고, 이후에는 한 명이 뒤에서 페어웨이 랜딩 존을 바라보며 티잉 구역의 방향을 설정했다. 티잉 구역은 랜딩 존을 똑바로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새롭게 옮긴 티 마커 바로 아래 지면에는 하얀 색 페인트로 2개의 점을 찍었다. 혹시 티 마커가 누군가에 의해 옮겨지더라도 원래 위치를 정확하게 찾기 위해서다. 헛갈릴 수 있는 전날 티 마커 표시는 지웠다. 아울러 선수들이 산뜻한 마음으로 티샷을 날릴 수 있도록 바닥에 흩어져 있는 부러진 티 등도 치웠다. 평소 골프장에 가면 블랙, 블루, 화이트, 옐로, 레드 등 여러 티잉 구역이 있지만 대회 때에는 한 곳만 사용한다. 따라서 사용하지 않는 티잉 구역의 마커는 가급적 시야에 들어오지 않도록 치워야 한다.
밤사이 동물 흔적 없애고 홀 위치 꼼꼼히 확인
카트를 타고 이동하면서는 빠른 눈으로 페어웨이와 벙커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어떤 곳에 가면 밤사이 노루나 멧돼지가 와서 모래나 잔디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도 해요. 간단한 건 경기위원이 고무래 등으로 정리를 하지만 심각한 수준이면 코스관리팀에 곧바로 연락하죠.” 이날은 한 홀의 벙커 모래에는 새가 덩실덩실 원을 그리며 춤을 춘 듯 발자국이 어지럽게 나 있었다. 다행히 깊이 파인 수준은 아니어서 두 위원이 말끔히 정리했다.
경기위원이 가장 세심하게 확인하는 것 중 하나는 홀 위치다. 전날 골프장 측에 다음날 홀 위치를 전달하면 골프장 직원이 저녁이나 당일 새벽에 새롭게 홀을 뚫어놓는다. 선수들에게 배포하는 홀 안내도와 실제 뚫린 홀 위치가 일치하는지 꼼꼼하게 체크해야 한다.
안내도에 홀 위치는 그린 시작점부터 홀이 뚫린 그린 중앙까지의 거리와, 홀에서 그린 가장자리까지의 거리로 표시한다. 예를 들어 ‘16, 7R’이라고 표시돼 있으면 홀이 그린 시작점에서 중앙 방향으로 16m, 90도 방향 우측 그린 끝에서 7m 지점에 위치해 있다는 뜻이다. 그린의 시작점은 보통 알파벳 ‘T’, 끝 지점에는 동그라미(○) 표시를 해 둔다. 시작점에 T자 표시를 하는 건 그린 중앙까지의 거리를 재는 데 필요한 끝 지점의 방향을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김 위원은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것 중 하나”라며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여줬다. 애초 10cm였던 것에 8mm를 더해 ‘108mm’를 표시한 자그마한 자였다. “일부 골프장 중에서는 플레이 속도를 빠르게 하려고 규정(108mm)보다 홀을 크게 뚫는 경우도 있어요. 제가 아는 곳만 해도 세 군데나 돼요. 그러니 직업상 가끔 체크를 할 수밖에요.”
그린 상태를 점검할 때는 홀 위치 외에도 낙엽이나 이슬, 서리 등이 말끔히 치워져 있는지, 깃대는 잘 뽑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육체적으로 힘들지만 자긍심과 보람”
전반 4~5개 홀 정도 코스 점검을 마쳤을 때 안개로 인해 출발이 지연됐다는 무전이 날아왔다. 당초 6시40분에 첫 조가 나갈 예정이었으나 20분이 늦춰졌다. 김 위원은 “시간을 조금 벌어서 서두르지 않아도 될 것 같다”면서도 “그만큼 끝나는 시간은 늦어지니 꼭 좋아할 일만도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전날 궂은 날씨 등으로 인해 경기를 다 마치지 못했을 때는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잔여 경기를 해야 하고, 그 후에 새로운 라운드를 또 준비해야 하니 정신이 없다”고 했다.
김 위원이 코스 셋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뭘까. “무엇보다 공정한 평가가 이뤄져야 해요. 잘못 쳤는데 운에 의해서 좋은 스코어가 나오거나, 그 반대로 잘 친 샷이 불이익을 받으면 안 됩니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합니다.”
마지막 홀 점검을 마칠 때쯤 첫 조가 막 출발을 하고 있었다. 김 위원은 “새벽에 나오고 밤늦게 들어가니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만 무사히 대회를 마친 다음에는 자긍심과 함께 보람을 느낀다. 이제 또 다른 하루의 본격적인 시작”이라며 카트를 몰고 떠났다.
◆ 경기위원은 꼭두새벽부터 뭘 할까
1. 첫 조 티오프 1시간30분 전 코스에 나가 셋업 상태를 점검한다.
2. 그날 날씨, 참가인원, 코스상태, 경기 수준 등의 여건에 맞게 티잉 구역의 위치를 변경한다. 변경된 위치는 취합해 보고한다.
3. 밤사이 벙커나 그린 상태에 이상은 없는지 확인한다. 간혹 노루, 멧돼지 등이 벙커나 그린을 파헤쳐 놓은 경우가 있다. 현장 해결이 어려우면 코스관리팀에 연락해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
4. 홀이 정확한 곳에 위치했는지 선수들에게 배부할 안내도와 대조하면서 체크한다. 깃대도 잘 뽑히는지 확인한다.
5. 경기를 예정된 시간에 시작할 수 있는지 파악한다. 안개가 자주 끼는 봄과 가을에는 티샷의 낙하지점이 티잉 구역에서 육안으로 보이는지, 세컨드 샷 지점에서는 깃대가 보이는지 확인한다.
6. 밤사이 비가 내렸거나 현재 오고 있다면 페어웨이, 벙커, 그린 등에 물이 고인 곳은 없는지 확인한다. 아울러 로컬룰(프리퍼드 라이, 볼 닦기 등)의 적용 여부에 대해서도 검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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