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 간 합의가 없을 경우 ‘제사 주재자’를 가장 가까운 직계비속 가운데 최연장자가 맡아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아들을 우선 제사 주재자로 정했던 기존 법원 판례가 뒤집힌 것은 2008년 이후 15년 만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11일 숨진 A 씨 유족 간에 벌어진 유해 인도 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파기 환송했다.
대법원은 “제사 주재자는 공동상속인 간의 협의에 의해 정하되 협의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은 한 피상속인의 직계비속 중 남녀·적서를 불문하고 최근친의 연장자가 제사 주재자로 우선한다”고 판결했다. 장남·장손자 등 남성 상속인을 우선하는 것이 성별에 의한 차별을 금지한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다. 또 개인의 존엄과 양성평등에 기초한 혼인과 가족생활을 보장하는 헌법 정신에도 합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제사 주재자는 말 그대로 제사를 주재하는 사람으로 민법상 고인의 유해와 분묘 등 제사용 재산의 소유권을 갖는다.
대법원은 “현대사회의 제사에서 부계혈족인 남성 중심의 가계 계승 의미는 상당 부분 퇴색했다”며 “제사용 재산의 승계에서 남성 상속인과 여성 상속인을 차별하는 것을 정당화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다만 대법원은 ‘최근친 연장자’가 제사 주재자로 부적절한 사정이 있다면 법원의 판단을 받도록 했다. 또 해당 법리는 판결 선고 이후 제사용 재산의 승계가 이뤄지는 경우에만 적용하기로 했다. 법리 변경에 따른 법적·사회적 혼란을 막는다는 취지다.
A 씨는 1993년 배우자와 혼인해 딸 2명을 낳았다. 그러나 2006년 다른 여성에게서 아들을 얻었다. 이후 A 씨가 사망하자 혼외자 생모가 배우자·딸들과 합의하지 않고 고인의 유해를 경기도 파주의 추모공원 납골당에 안치했다. 이에 배우자와 딸들이 ‘A 씨의 유해를 돌려달라’며 혼외자 생모와 추모공원 측을 상대로 소송을 냈으나 1·2심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재판의 핵심은 제사 주재자를 정하는 데 합의가 없을 경우 어떻게 판단하느냐였다. 1·2심은 ‘망인의 공동상속인 사이에 협의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 적서를 불문하고 장남 내지 장손자가, 아들이 없을 때는 장녀가 제사 주재자가 된다’고 판결한 2008년 11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에 따라 A 씨 배우자와 딸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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