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최대 위상을 자랑하는 예술 축제 광주비엔날레가 폐막을 약 3주 앞두고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횟수로 14회 째를 맞는 이번 비엔날레는 기나긴 팬데믹 이후 개최돼 그 의미가 더 깊다. 주제는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Soft and Weak Like Water)로 이질성과 모순을 수용하는 물의 특성을 통해 도가 근본사상을 담았다. 물은 오랜 시간 걸쳐 스며들며 부드러운 변화를 야기한다. 그래픽디자이너 강문식이 이번 비엔날레 아이덴티티를 맡아 이러한 특성을 타이포그래피에 시각적으로 담았다. 강함과 부드러움이 만나 그리는 경계의 모호함을 통해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를 형상화했다.
박양우 광주비엔날레 대표는 14일 오후 열린 차담회에서 “코로나19 영향으로 올해에는 9개 국가에 그쳤지만 내년에는 20여 개 국가가 전시에 참여할 예정”이라며 지금이 광주비엔날레에 무척 중요한 시기임을 강조했다. 또 “30주년을 바라보는 만큼 대한민국을 넘어서 아시아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행사를 진행할 계획이며, 위기이자 기회가 될 수도 있는 현시점에서 광주비엔날레가 현대예술사의 전초병 역할을 해 미래 담론을 형성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본 전시의 작품들은 '은은한 광륜', '조상의 목소리', '일시적 주권', '행성의 시간들' 등 4개의 소주제로 나뉜다. 또한 메인 전시관 외에도 국립광주 박물관, 호랑가시나무 아트 폴리곤, 무각사, 예술공간의 집 등 광주 로컬 정취가 느껴지는 다양한 공간에서 전시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전시 본관에는 총 30개국 출신 79명 작가들의 작품 300여 점이 설치돼 상당한 규모를 자랑한다. 광주가 주최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국적의 작가는 10% 미만으로 제 3국 출신 작가들의 다채로운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출품작은 대부분이 작가의 정체성과 이념에서 출발했지만 오롯이 혼자만의 작업이 아닌 작가의 뿌리가 시작된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공동작업 형태로 제작됐다는 점이 특징이다. 코로나로 인해 세계 각국은 문을 걸어 잠그고 고립된 시간을 보냈으나 엔데믹과 함께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작품에는 소통과 연결의 키워드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번 광주비엔날레 출품작들이 향하는 방향은 단순히 일방적이지 않다. 관람객들이 함께 느끼고 만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호랑가시나무 아트 폴리곤에서 만나볼 수 있는 일본 설치미술가 모리 유코의 ‘〈I/O〉(2011~2023)’는 일상의 사물과 외부의 힘이 상호 작용하는 키네틱 조형작이다. 흰색 천이 나풀거리는 전시장은 국내 소설가 한강의 『흰』(2016)에 영감을 받았다. 작품은 그날의 날씨와 방문한 관람객이 만들어내는 습도, 온도, 소리 등을 통해 움직이고 변화한다. 이는 보이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그리고 존재해온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상징 체계를 구축한다. 작가는 재구성된 〈I/O〉를 ‘기록된 적 없는 수많은 역사들‘로 바라보고, 광주에서 수집한 재료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광주의 응축된 역사와 한강의 『흰』, 그리고 자신의 〈I/O〉를 중첩시켰다.
네덜란드, 스위스,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이탈리아, 중국, 캐나다, 폴란드, 프랑스 등 총 9개국이 참여하는 파빌리온 전시는 이이남갤러리, 이강하미술관 등의 이색 장소에서 만날 수 있다. 특히 캐나다관에서는 <신화, 현실이 되다>라는 주제로 동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북극 지역 소수민족 이누이트의 예술을 다룬다. 전통을 계승해 작업해온 이누이트 드로잉과 조각 작품이 캐나다를 대표 한다는 점은 관객들에게 신선한 반전을 선사한다. 이누이트 예술은 캐나다 정부가 국제 외교 수단으로 활용하는 등 이미 수십 년에 걸쳐 사실상 캐나다의 국가 정체성으로 자리 잡아왔다. 광주라는 지역적 특성과 시대정신을 토대로 권위주의를 탈피하고 주목받지 못하던 소수 약자들을 향한 시선을 이끌고자하는 광주비엔날레 정신과 금번 전시의 정체성이 엿보이는 기획이다. 다양한 세계에서 발견한 ‘약해 보이지만 강한 힘과 가능성을 지닌 것들’에 대한 연대와 돌봄의 장인 셈이다.
최두수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한국의 대중문화 장르처럼 순수 예술 분야도 점차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을 것이라며 광주비엔날레는 내년 30주년을 기반으로 50주년 100주년까지도 내다보는 미래 기반을 마련해 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광주비엔날레가 광주광역시와 함께 손을 잡고 예술을 품은 문화도시 기반의 관광산업까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한편 내년 개최되는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한국은 국가관이 아닌 광주비엔날레관 타이틀로 단독 특별전을 연다. 이는 그만큼 광주비엔날레의 위상이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번 비엔날레 총괄을 맡은 이숙경 예술감독이 최근 영국 맨체스터 대학 휘트워스 미술관장으로 선임되는 겹경사를 맞이해 앞으로 더 큰 글로벌 영향력을 기대해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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