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똑똑 녹아 흘러내릴 정도로 더운 여름, 아파트의 전기가 나갔다. 반장 아주머니는 사람들에게 녹아 흘러내린 달로 샤베트를 만들어 준다. 사람들은 손전등 대신 달 샤베트를 들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백희나의 명작 그림책 ‘달 샤베트’의 내용이다. 사실 어른들은 여기까지만 읽어도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런 상상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궁금증이 더해진다. 아파트 주민들은 집에서 무얼 하고 지낼까.
백희나의 따뜻한 그림과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의 기획이 만났다. 2020년 한국인 최초로 세계적인 아동 문학상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추모상을 수상한 백희나 작가의 작품을 평면이 아닌 입체로 만날 수 있는 첫 그림책 전시가 열린다. 이번 전시는 예술의전당이 개관 30주년을 맞이해 출판사 책읽는곰과 함께 여는 백희나 작가의 첫 단독 개인전이다. 전시에는 ‘구름빵(2004)’, ‘달샤베트(2010)’, ‘알사탕(2017)’부터 최근작인 ‘연이와 버들도령’까지 11권의 책 속 명장면을 만든 140여 점의 작품과 세트, 한 편의 영화와 같은 미디어가 전시된다.
동화책에서 삽화는 조연일 뿐이다. 책을 이끄는 주체는 문장이다. 하지만 그림책은 다르다. 그림책에서 삽화는 주연 혹은 공동주연이다. 백희나는 삽화를 평면이 아닌 입체로 구현해 그림책의 생동감을 더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 입체가 단지 몇몇 캐릭터의 얼굴이나 인체 정도가 아니다. 아파트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아파트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의 거실 풍경까지도 생생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백희나의 그림책을 본 독자는 누구나 궁금증을 갖는다. ‘과연 이 장면은 그림으로 그린 것일까, 프로그램으로 구현한 것일까’.
정답은 둘다 ‘아니오’다. 백희나의 그림책 속 모든 장면은 작가가 한 땀 한 땀 제작한 것이다. 작가는 미국의 칼아츠에서 캐릭터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 그림책의 한 페이지가 될 장면은 마치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생생한데 이는 작가가 영화 세트장과 같은 디테일한 미니어처를 종이, 섬유, 스컬피 등으로 제작한 덕분이다. 손수 만든 캐릭터 인형과 벽지, 가구, 소품, 드로잉 등이 어우러진 세트장을 손수 짓고 이를 영화를 찍듯 사진으로 찍어 그림책 속 삽화로 완성하는 것.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제작한 후 한 점도 버리지않고 소중히 보관한 이 모든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전시는 그림책을 읽을 때 만큼의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알사탕’ 주인공 동동이가 아버지를 뒤에서 끌어안는 장면에서는 평범한 이웃의 집안 구석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따뜻한 재미를 준다. ‘달 샤베트’ 속 아파트 속 12가구의 집 안에는 CCTV를 설치해 모니터를 통해 거실 속 풍경을 볼 수 있도록 꾸몄다. ‘장수탕 선녀님’ 전시 공간은 실제 작품의 배경인 목욕탕을 꾸미고 선녀님을 실물 사이즈로 새롭게 제작했다.
‘연이와 버들도령’을 영화처럼 재연한 실감형 미디어 콘텐츠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췄다. 어른들은 잠시 바닥에 앉아 어린이의 시선으로 작품을 감상하길 권한다. 백희나 작가는 “그림책은 한 아이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기에 무조건 잘해야 하는 과업이다. 저 역시 최선을 다했는데,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스스로에게 떳떳했다”며 전시 준비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한편 예술의전당은 ‘달 샤베트’를 음악극으로 구성한 새로운 전시도 준비 중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매체에 대한 편견이 없어졌다"며 "이야기의 힘이 가장 중요하다는 전제 하에 콘텐츠 중심으로 다양한 매체로 확장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며 IP의 확장가능성을 내비쳤다. 전시는 10월 8일까지.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