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동물에는 학명이 있다. 인류도 학명이 있다. 지금 현인류는 ‘호모 사피엔스’라고 불린다. 다윈 이래 모든 동물은 진화의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고, 오늘날에도 진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식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인류도 예외는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이름은 복잡다단한 진화의 과정을 거쳤다는 증표다.
한때 침팬지 계통에서 시작된 단선적인 진화로 현인류가 탄생했다는 통념이 퍼진 적이 있었다. 1965년 자연과학을 다룬 도서에 실린 ‘위대함을 향한 행진(The March of Progress)’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었다. 이후 20세기 후반에는 나무가 가지를 치듯 인류의 계통이 갈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한번 갈라진 가지는 독자적으로 발전하다가 멸종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한국 최초의 고인류학 박사이자 캘리포니아 대학교 리버사이드 인류학과에 재직 중인 이상희 교수는 이러한 생각이 모두 틀렸다고 주장한다. 21세기 들어 인류의 다른 계통 사이에서도 유전자 교환이 이뤄졌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의 진화가 “차라리 갈라졌다가 다시 만나고 다시 갈라지는 강줄기의 모습에 가깝다”고 표현한다.
책은 최신 연구와 가설을 소개하면서 그간 인류의 진화에 대해 당연하게 여겨졌던 추측을 하나둘씩 재정립한다. 흔히 ‘두 발 걷기’는 인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신 연구에 따르면 또 다른 고인류도 두 발 걷기를 했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작은 두뇌를 가진 한 고인류가 주검을 가져가 매장할 정도로 지적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은 새로운 깨달음을 시사한다.
책은 아프리카가 아닌 아시아에서 인류의 기원을 찾는 움직임도 소개한다. 인류가 기원한 아프리카와,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가 기원한 유럽과 달리 아시아는 고인류학계에서 존재감이 없던 지역으로 꼽혀 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가 누적되면서 아시아의 인류가 다른 지역만큼 오래된 역사를 지녔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한반도도 마찬가지다. 2000년 함경북도 화대군의 야산에서는 고인류 화석 ‘화대 사람’이 발견됐다. 30만 년 전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화석을 통해 한반도에도 고인류가 살았으며 그 흔적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 바 있다.
인류의 발자취를 더듬는 과정은 우리가 누구이고, 왜 지금 존재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화석에서 유전자를 직접 추출하는 등 고인류학 기술의 발전도 거세지고 있다. 저자는 “기술의 발전은 지금까지 생각해 온 ‘자료’의 영역을 상상하지 못할 영역으로 확장해갈 것”이라고 예측한다. 인류에게 필요한 건 새롭게 밝혀진 ‘우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1만 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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