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강제추행 여부를 판단하는 구성요건인 ‘폭행 또는 협박’의 기준을 완화해 피해자가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라면 강제추행죄 성립이 가능하도록 했다. 기존에 추행행위로 처벌하지 못해 생기는 행사처벌의 공백을 막겠다는 취지다. 1983년 이후 유지되어온 판례를 40년 만에 변경하면서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이를 입증해야 하는 강제추행 피해자들의 2차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21일 성폭력처벌법 위반(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벌금 1000만 원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강제추행죄의 범죄구성요건과 보호법익, 종래의 판례 법리의 문제점, 성폭력 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 판례 법리와 재판 실무의 변화에 따라 해석기준을 명확히 할 필요성 등에 비춰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의 의미는 다시 정의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이 새롭게 제시한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의 의미는 ‘상대방의 신체에 대해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폭행)하거나 일반적으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해악을 고지(협박)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A씨의 행위는 피해자의 신체에 대해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해 강제추행한 것에 해당한다고 결론내렸다.
군인 신분인 A씨는 2014년 8월 15일 자신의 방에서 숙제를 도와주던 사촌 여동생(당시 15세)을 침대에 쓰러뜨리고 신체 부위를 만지고 끌어안는 등 강제추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1심에서는 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징역 3년이 선고됐다. 반면, 2심은 원심을 깨고 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혐의를 무죄로 판단해 벌금 1000만 원을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의 행위가 피해자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고 예비적 공소사실인 아동청소년성보호법상 위계 등 추행 혐의만 인정했다.
쟁점은 A씨가 피해자에 대해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을 가해 추행했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였다. 기존의 강제추행죄는 1983년 대법원 판례에 따라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하는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이 있을 경우에만 적용 가능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기존의 판례를 깨고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은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가 요구되지 않고, 상대방의 신체에 대해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폭행)하거나 일반적으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해악을 고지(협박)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그 근거로 대법원은 항거 곤란을 요구하는 종래의 판례 법리는 강제추행죄의 범죄구성 요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형법상 성폭력처벌법 등 강제추행죄에 관한 현행 규정은 폭행·협박의 정도를 명시적으로 한정하고 있지 않고, ‘강제(?制)’의 사전적 의미는 반드시 상대방의 항거가 곤란할 것을 전제로 한다고 볼 수 없다는 논리다. 또 원하지 않는 성적 행위를 폭행·협박을 수단으로 또는 방법으로 하는 경우 강제추행죄의 보호법익인 소극적 성적 자기결정권(원하지 않는 성적 행위를 거부할 권리)이 침해된다는 점도 이유로 들었다.
대법원은 “근래의 재판 실무는 종래의 판례 법리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행위가 폭행죄에서 정한 폭행이나 협박죄에서 정한 협박의 정도에 이르렀다면 사실상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라고 해석하는 방향으로 변했다”며 “이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자칫 성폭력범죄의 피해자에게 이른바 ‘피해자다움’을 요구하거나 2차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문제 인식을 토대로 형평과 정의에 합당한 형사재판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에 대해 “범죄구성요건의 해석기준을 명확히 함으로써 사실상 변화된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현재의 재판 실무와 종래의 판례 법리 사이의 불일치를 해소하고, 형평과 정의에 합당한 형사재판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며 “다만, 법해석만으로 ‘비동의 추행죄’를 인정하자는 취지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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