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전문학교 3학년 학생 20여 명 중 세 명의 여학생이 섞여 밤낮 없는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다. 3명 모두 학년 시험을 보지 않고 남학생을 따라 진급해 3학년에서 수학 중인데 성적이 뛰어나 남학생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남녀의 구별이 심한 조선에서 여의사의 진찰이 가능해지면 편리한 점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1916년 9월 23일자 ‘매일신보’가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공부하는 여학생들을 소개한 기사의 일부분이다. 19세기 말 조선의 여성들에게는 ‘치료 받을 권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로 서양과의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되고 호러스 뉴턴 알렌을 필두로 개신교 의료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조선인들도 현대 의술의 혜택을 입게 됐지만 여성은 예외였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의 영향으로 부녀자들은 남성과 한 공간에서 치료를 받기는커녕 미국인 남성 의사에게 진찰받는 것조차 금기시됐다.
이런 상황이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부(W.F.M.S.)에 전해지면서 한국 최초 여성 전문 병원이자 이화의료원의 전신인 보구녀관이 서울 한복판에 세워졌다. 이화학당 교육생 출신인 박에스더가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탄생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의료 활동을 펼칠 여성 의료인이 턱없이 부족하자 의료 선교사 로제타 홀 여사는 광혜여원에 여성의학강습반을 만들었다. 경성의 조선총독부 의학강습소에 요청한 끝에 1914년 광혜여원 여성의학강습반에서 기초의학을 공부하던 여학생 4명에게 입학 기회가 주어졌다. 1916년 총독부 의학강습소가 경성의전으로 전환됐고 3명의 여학생은 1918년 3월 경성의전 제2회 졸업식에서 남학생 44명과 함께 졸업장을 받았다. 국내파 출신의 한국인 여의사가 최초로 탄생하던 순간이다.
3명의 졸업자는 같은 해 4월 조선총독부에서 의사 면허를 발급받아 활동에 나섰다. 동대문부인병원에서 20년 이상 헌신하며 한국인 최초 병원장을 역임한 안수경, 동대문부인병원을 거쳐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갔다가 1921년에 개원한 인천부인병원(현 인천기독병원)을 운영했던 김영흥, 메리 커틀러 의사와 함께 광혜여원에서 진료 활동을 시작해 부부 의사로 장티푸스 환자들을 진료하다 남편이 사망하자 인천부인병원에서 진료 활동을 이어갔던 김해지가 주인공이다.
이화의료원이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까지 오랜 시간 묻혀 있던 한국 여성들의 의료 역사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서울 강서구 이대서울병원 지하 1층에 ‘이대동대문병원 역사라운지’를 마련하고 개관 첫 기획 전시로 ‘W.F.M.S.,한국 초기의 여의사들에게 길을 비추다’를 선보인다.
지난달 31일 개관한 전시관에 들어서면 보구녀관부터 경성의전·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등에서 학업을 마치고 동대문부인병원에서 근무했던 여성 의료인 22명의 행적과 함께 116년간 이화의료원의 발전을 이끌었던 이대동대문병원의 발자취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대동대문병원은 1893년 볼드윈진료소로 출발해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동대문부인병원을 거쳐 2008년까지 운영되다 경영난으로 2008년 이대목동병원과 통합됐다. 이대서울병원은 동대문병원 부지 매각 대금을 마중물로 세워졌다. 이대서울병원 지하 1층에 75평 규모로 조성된 전시 공간이 더욱 뜻깊은 이유다.
유경하 이화여대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은 “2019년 이대서울병원 개원 당시 복원한 보구녀관에 병원 가족들과 의대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모습을 보며 이대동대문병원을 떠올렸다”고 밝혔다. 유 원장은 의과대학 졸업 후 인턴·레지던트·전임의 시절을 동대문병원에서 보냈다. 2021년 4월 구성원들과 함께 135년사 편찬위원회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꼬박 2년간 국내외 역사 자료, 선교 보고서 등을 연구하는 데 매달린 결과 의료 역사에서 활약했던 여성들을 재조명할 수 있었다.
그는 “동대문병원의 노력과 땀방울이 지금의 이대서울병원을 만들었다.116년을 지탱한 ‘섬김과 나눔’의 정신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이대동대문병원 기록을 보고 듣는 동안 의료의 본질 가치와 당시 헌신한 이들의 정신이 되살아나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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