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시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159가구를 대상으로 한 신탁 전세·분양사기가 발생해 대규모 공매 물량이 쏟아졌다. 해당 아파트는 2011년 대한토지신탁과 담보신탁계약이 체결됐으나 전세·분양 계약이 소유권을 가진 신탁사의 동의 없이 이뤄져 피해 구제를 받을 길도 없는 상황이다. 피해자대책위원회에 따르면 피해 규모만 수백억 원이며 이중·삼중으로 전세·분양 계약이 이뤄져 피해자는 약 400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12일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운영하는 온라인 공매 시스템 온비드에 따르면 대한토지신탁은 지난달 20일 용인시 기흥구 상하동에 위치한 ‘지석마을그대가크레던스’ 아파트 63채에 대한 공매 공고를 올렸다. 한 아파트 단지 내에서 이 정도 규모의 공매가 한꺼번에 나온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1차 매각 공고 당시 최저 입찰가는 가구당 7억~8억 원으로, 공매 규모만 500억 원에 이른다. 현재 3차까지 입찰이 진행됐지만 피해자들의 명도 문제로 모두 유찰됐다.
이번 사건은 해당 단지의 사업 시행사인 지역주택조합이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은 후 2011년 대한토지신탁과 담보신탁계약을 체결하면서 비롯됐다. 신탁등기가 된 집은 신탁사가 소유권을 갖는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해당 아파트 159채를 담보로 한 부실채권(NPL)을 매입한 대부 업체 및 개발 업체가 파견한 분양팀과 전세·분양 계약을 체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이 계약이 신탁사의 동의 없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후 대부·개발 업체가 자금난에 시달리자 공매에 부쳐지게 됐다.
대한토지신탁은 공매 공고문에서 “공매 물건에 대해 임차권을 주장하는 전입 세대가 존재하나 당사와 임대차계약을 체결한 사실이 없다”며 명도 등 모든 책임은 매수인이 부담해야 한다고 밝혔다. 63가구에 대해 우선 1차 공매가 진행 중이며 향후 96가구에 대해서도 추가 공매가 실시될 예정이다.
신탁사기는 다른 전세사기 피해자들과 달리 마땅한 구제 방법이 없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피해자들은 사실상 집주인인 신탁사의 동의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적법한 임대차계약을 맺은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이에 전세사기특별법에 따른 경·공매 유예, 우선매수권 청구를 신청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부업체가 신탁사 동의없이 계약…은행지점장도 당했다
“부동산중개업소에서 신탁사 소유 물건이라 시세보다 저렴하게 입주할 기회라고 했습니다. 분양 계약을 체결하고 돈을 보냈는데 명의변경을 안 해줘서 입주라도 시켜달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신탁사가 끼어 있어서 소유권 이전은 당장 안 되니 먼저 전세로 들어오라고 해서 전세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알고 보니 같은 호수에 이미 다른 전세 세입자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이중으로 계약을 맺은 거죠. 집을 담보로 돈을 빌린 사람이 돈을 갚지 못하자 계약한 집이 공매에 넘어갔고 세입자들은 돈을 날릴 판인데 사기꾼들은 지금도 본인들만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며 피해자들을 우롱하고 있습니다.”
10일 최근 60여 채가 무더기로 공매에 나온 경기 용인시 기흥구 ‘지석마을그대가크레던스’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피해자 A 씨(60대)는 매매·전세사기 피해를 본 사실을 호소하며 울분을 터뜨렸다.
아파트 단지 정문에는 “분양사기 철저수사” “전세사기 철저수사” “명도집행 결사저지” 등의 내용이 담긴 빨간색 플래카드들이 길게 걸려 있었다. 피해자대책위원회 관계자는 “공매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에게 해당 아파트의 문제를 알려야겠다 싶어서 플래카드를 걸었다”며 “신탁사가 소유한 집은 총 159채로 앞으로 96채가 더 공매에 나올 예정인데 사기꾼들이 이중·삼중으로 계약을 맺어서 피해자가 400명이 넘는다”고 말했다.
2010년에 입주한 단지에서 왜 지금 분양·전세사기 피해가 불거진 것일까. 지석마을그대가크레던스의 사업시행자는 구성상하지역주택조합이었다. 당시 시장 상황이 악화하자 수분양자 대부분이 계약을 포기했다. 중도금대출을 알선했던 임광토건도 2011년에 도산하는 등 상황이 어려워졌다. 같은 해 한국저축은행·국민은행 등이 조합에 대출을 해주면서 대한토지신탁과 담보신탁계약이 체결됐다. 이때부터 해당 부동산의 매매·전세 계약을 체결하려면 신탁사의 동의를 구해야 했다.
부동산 신탁은 집주인(위탁자)이 부동산 소유권을 담보로 신탁회사(수탁자)를 통해 은행(수익자)으로부터 자금을 빌린 것을 의미한다. 집주인이 신탁회사를 통해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을 다 갚을 때까지 신탁회사는 부동산의 소유권을 가진다.
이후에도 한동안 분양 시장이 침체를 걸으며 미분양은 줄어들지 않았고 2015년에 B 대부 업체와 C 부동산개발 업체가 아파트 159채에 대한 수익증권을 매입했다. 피해자들은 이듬해인 2016년부터 본격적인 분양·전세사기 피해가 발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A 씨는 B 업체에서 나온 분양팀의 말을 믿고 2020년 6월께 전용면적 163㎡를 3억 9000만 원에 매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동일면적 아파트 시세는 5억 5000만 원 선으로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을 보고 덜컥 계약했다. A 씨는 “신탁사 소유라 시세보다 저렴한데 신탁사는 본인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회유했다”며 “계약부터 입주까지 법무법인이 끼어 있어 법적으로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했다”고 토로했다.
피해자대책위원회 관계자는 “B 대부 업체와 C 부동산개발 업체가 신탁사의 동의 없이 분양팀을 마구잡이로 파견해 이중·삼중으로 계약을 체결했다”며 “피해자 대부분은 은퇴하고 노후를 보내려던 50·60대로 피해자 중에는 은행지점장·공인중개사 등도 있다”고 말했다.
B 대부 업체와 C 부동산개발 업체는 부동산 상승기인 2021년에 추가 대출을 일으키면서 기존 수익증권을 담보로 제공했다. 이후 부동산 시장이 하락기에 돌입하면서 원금과 이자를 납입하지 못하자 우선수익권자인 하나은행의 의뢰로 해당 아파트 159채는 공매에 부쳐지게 됐다.
피해자 E 씨는 “신탁사가 소유한 물건이라 공매 유예도 되지 않고 있다”며 “보증금 구제도 받지 못하고 있어 차라리 공매가 10차까지 진행된 후 낙찰받자는 전세사기 피해자도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 공매 유예·우선매수권 청구 안돼…막막
다른 전세사기 피해자들과 달리 이들이 구제받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신탁 전세사기 피해자는 주택임대차보호법상 대항력이 없어 우선매수권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한법률구조공단이 최근 5년간(2018년~2022년) 신탁등기된 부동산 사기 관련 법률 상담을 제공한 건수는 1만 5000여 건에 이른다.
국토부 관계자는 “신탁사의 동의를 못 받았기 때문에 임차인으로서의 권리가 없고 이에 피해자가 공매 유예 및 우선매수권 청구를 행사할 수 없다”며 “다만 전세사기특별법에 따라 기존 대출을 저금리로 갈아탈 수 있는 대환대출이나 공공임대주택 입주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신탁등기된 부동산을 계약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최지수 법무법인 린 건설부동산팀 변호사는 “신탁계약이 체결된 부동산을 계약할 때는 반드시 신탁 원부를 확인하고 전문가의 검증을 거쳐야 한다"며 “최근 신탁사기 사례가 계속되고 있는 만큼 등기소에 가서 떼어야 하는 신탁 원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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