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메트로놈처럼 사선으로 빠르게 고개 젓기를 네 번. 관객들이 일순간 숨을 삼켰다. 일종의 신호탄처럼 두 손이 망설임 없이 건반을 누비기 시작했다.
지난 3일 시각 장애를 가진 일본의 피아니스트 츠지이 노부유키가 13년 만에 내한해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관객들과 만났다. 2005년 쇼팽 콩쿠르 세미파이널에 올라 최연소로 비평가상을 받았고 2009년에는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15년의 시간 동안 그의 피아노 소리만큼 단단해진 건 음악을 대하는 깊이다.
공연에 앞서 인터뷰에서 그는 피아노를 하는 과정에서 장애로 인한 힘든 일을 어떻게 극복했느냐는 질문에 “애초에 힘든 게 없었기 때문에 극복할 것도 없었다”며 “그저 즐겁게 했다”고 웃으며 답했다. 까다로운 기교가 필요한 곡도 음표가 쏟아지고 악상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난곡들도 재미있는 도전이라는 점이 강렬하게 남았다.
이번 공연을 통해 ‘즐거움’이라는 정서는 관객석에도 전달됐다. 첫 곡인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 5번에서는 춤을 추는 것 같은 생동감을 극대화해 보여줬다. 특히 다양한 3박자를 보여주는 익살스런 춤에서 따온 ‘지그’ 속 경쾌함이 관객들을 들뜨게 했다.
쇼팽 마니아인 그가 선보인 네 개의 즉흥곡에는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가는 연주가 일품이었다. 앙드레 지드 소설가는 하나의 선율에서 다른 선율로 이음매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쇼팽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은 바 있는데 다른 기교 없이 이 특징만으로도 쇼팽의 개성을 살려냈다. 기술력이나 기교 측면에서는 다른 프로 피아니스트들에 비해 부족할 수 있는 점 역시 무리 없이 보완했다는 평가다. 허명현 클래식 칼럼니스트는 “쇼팽이나 라흐마니노프에서도 선율에 감정을 싣기보다 담백하고 담담한 연주를 했다”며 “특히 음악과 음악을 연결하는 방식이 독특하고 예술적이었다”고 짚었다.
또 다른 절정은 프랑스의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의 ‘판화’였다. 판화의 마지막곡인 ‘비 오는 정원’은 비의 진행 상황에 따라 마디마다 셈여림이 급격하게 세지거나 점점 세지게 등 다양하게 변주된다. 평소에도 낯선 곳에 가서 새로운 공기를 맡거나 낯선 소리를 모티브로 떠오르는 영감을 바탕으로 작곡을 한다는 노부유키이기 때문에 더욱 예리한 감각으로 표현해낸 곡이었다.
한국 관객들에게 처음으로 선 보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악흥의 순간’(총 6곡)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생동감과 담대한 연주를 밀고 갔다. 연주를 마친 그는 무대를 동서남북으로 나눠 네 번이나 보이지 않는 관객들을 향해 깊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앙코르 곡에서도 무대 매너는 빛을 발했다. 세 곡에 달하는 앙코르의 마지막 곡은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였다. 익숙한 전주가 들려오는 순간 관객들은 환호했다. 까다로운 곡으로 유명한 이 곡을 여유롭게 소화해내면서 특유의 종소리를 생동감있게 드러냈다. 앉아서 박수로 환호하던 관객들이 하나 둘씩 일어서기 시작했다. 비록 그에게 들리는 건 관객의 숨소리와 박수 소리가 전부였지만 관객들은 기립 박수로 예를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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