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같기도 하고, 늑대 같기도 한 생명체가 우주복을 입고 괴상한 세계를 떠돈다. 이 세계에는 알록달록 다채로운 동식물이 살고 있고, 커다란 눈을 가진 야자수도 있다. 다소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한 이 세계는 인간의 잠재의식이다. 잠재의식을 떠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의 이름은 ‘멜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온종일 멜로를 바라보는 키 큰 야자수의 이름은 ‘룰루’다.
멜로와 룰루라는 두 캐릭터로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현하는 팝아트 작가 스티븐 해링턴(Steven Harrington)의 개인전'스티븐 해링턴: 스테이 멜로'가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열린다.
팝아트는 추상표현 미술의 엄숙함과 고고함에 반대하며 등장한 미술 사조다. 팝아트 작가들은 직관적인 표현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그 작품을 상업적으로 시장에 선보이며 적극적으로 관람객과 교류한다. 대량 소비되는 제품에 자신의 작품을 적용하고, 이를 통해 더 많은 대중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팝아트 작가들의 역할이다. 스티븐 해링턴은 ‘멜로’라는 잠재의식을 상징하는 독특한 캐릭터를 통해 삶과 사회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보여주는 팝 아트 작가다.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작가의 개인전이지만 멜로와 룰루 자체가 낯설진 않다.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베어브릭이나 나이키, 크록스 등의 제품에서 등장한 인기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간의 형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캐릭터를 고민하다 멜로를 창조했다. 멜로는 인종이나 나이, 성별 등을 벗어나 누구나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도구이며, 멜로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인간의 잠재의식이다.
전시는 멜로와 룰루가 등장하는 회화와 대형 캐릭터 조각, 애니메이션, 드로잉, 판화 등 작가의 작품 속 세계관을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전시 초반에는 최신작인 대형회화에 초점을 맞췄고 좀 더 들어가면 초기 판화 작업 등 창작과정을, 후반부에서는 파트너십을 맺고 협업했던 작업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드넓은 전시장에 처음 들어서면 관람객은 세로 2m·가로 1.7m 크기의 대형 회화, ‘꽃향기를 맡기 위해 멈춰보세요’ 6점을 볼 수 있다. 빨강, 주황, 노랑 등 현란한 색의 꽃에 둘러싸인 멜로는 관객들에게 “어려운 시기 너무 고민만 하지 말고 현재를 살아보자”는 메시지를 던진다.
회화 옆에는 꽃을 들고 있는 커다란 멜로 동상이 서 있다. 작가는 “멜로가 그림 속에서 튀어 나왔다”고 말하며, 설치 작품을 설명했다. 또 다른 벽에는 멜로와 룰루가 바다를 유영하며 다양한 해양 동물과 만나는 모습을 그린 가로 10m 크기의 대형 회화 ‘진실의 순간’이 걸려 있다.
그림 속 캐릭터와 동물들을 통해 작가는 관객들에게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다. 그는 “(나의 작품은) 첫눈에 보기엔 재미있는 모습이지만 이런 만화적인 이미지들이 관객들을 사로잡게 되면 환경문제나 사회문제 같은 좀 더 심각한 주제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시장에서는 작가가 국내외 기업 브랜드와 협업한 작품도 볼 수 있다. 나이키 한정판 운동화부터 일본 패션 브랜드 베이프와 협업한 베어브릭 피규어 장난감 등이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작가는 나이키, 베이프 뿐 아니라 몽클레르, 크록스 등 다양한 대중 상품 속에 자신의 작품을 녹여낸다. 그는 “다른 주체들과 함께하는 작업은 나에게 큰 영감을 주고, 내 자신을 충만하게 한다”며 “그 대상이 사람이든, 회사든 브랜드이든 결과는 예측할 수 없지만 협업을 즐기고 있다”고 말했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은 작가와 대중이 직접 소통하는 ‘아티스트 토크’를 8일 개최하고, 다양한 전시 연계 이벤트도 계획 중이다. 전시는 7월 1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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