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국립현대미술관의 뒷마당 쪽에는 보물 제2151호인 종친부가 있다. 공중보행로를 사이에 둔 미술관의 뒷마당과 종친부의 앞마당에는 날씨가 풀린 지난 주말부터 돗자리를 펴고 앉거나 누워 인왕산의 경치를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관람객이 들어가 앉아도 되는지 확실치 않았던 잔디밭에 명확히 입장을 허락하는 의미의 ‘돌계단’이 새로 생긴 덕분이다. 마당 입구쪽에는 전통적인 느낌의 관목류가 심어져 있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날 때마다 나무와 꽃은 변화하며 거리를 걷는 사람들과 인사한다.
국립현대미술관 뒷마당의 조경을 새단장한 사람은 한국의 1세대 조경가 정영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오는 9월 22일까지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조경가 정영선의 삶과 조경의 세계를 조명하는 전시를 진행한다.
정영선은 50여 년간 한국의 아름다움을 담당해 온 조경 실력자다. 서울 선유도공원,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와 아시아공원, 탑골공원, 경춘선 숲길, 예술의전당 등 서울에서 자연 경관이 아름답다고 소문난 명소 대부분이 그의 손을 거쳐갔다. 경기도 호암 미술관의 희원, 휘닉스 파크, 포항 별서 정원, 제주 오설록, 남해 사우스케이프 등도 모두 정영선의 작품이다.
전시는 1970년대 대학원생 시절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인 작가의 프로젝트를 사진, 설계도, 영상 등으로 보여준다. 60여 개의 크고 작은 프로젝트에 대한 조경가의 아카이브 중 상당수가 대중에게 최초로 공개되는 것으로 우리가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장소의 나무와 숲이 어떻게 조성됐는지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전시이기도 하다.
작가는 대전엑스포, 인천국제공항, 삼성문화재단의 희원 등 공공프로젝트와 민간프로젝트를 아우르며 작업을 진행했다. 그의 작품 역사는 사실상 경제 부흥과 민주화 과정이 동시에 발현된 한국 현대사의 특징과 맥을 같이 한다. 그렇다고 미술관이 작가의 프로젝트를 연대기적으로 나열하지는 않는다.
전시는 크게 7개 묶음으로 나뉜다. 첫 묶음 ‘패러다임의 전환, 지속 가능한 역사 쓰기’에서는 한국 최초의 근대 공원인 탑골공원 개선사업(2002)과 비움의 미학을 강조한 광화문광장 재정비(2009) 등 수직에서 수평으로 공간의 정체성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조경의 역할이 드러난 프로젝트를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묶음인 ‘세계화시대, 한국의 도시경관’은 ‘아시아 선수촌 아파트 및 아시아 공원’, ‘올림픽선수촌아파트’ 등 국가 주도 프로젝트에서 조경가가 어떻게 발전된 도시 모습의 비전을 제시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세 번째 묶음 ‘자연과 예술, 그리고 여가생활’은 가족 단위의 여가 생활이 중요해진 1980년 대 이후 예술의전당, 휘닉스파크의 식재계획도와 피칭 자료 등이 공개된다.
‘정원의 재발견’이라 이름 지어진 네 번째 묶음에서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연못 구조인 ‘방지’가 놓여진 호암 미술관의 ‘희원’, 중국 광저우 사이의 교류 정원으로 조성된 광동성 월수공원은 ‘해동경기원’ 등의 사례를 살펴본다. 다섯 번째 묶음 ‘조경과 건축의 대화’에서는 조경가와 건축가의 유기적인 협업을 통해 탄생한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장소를 살펴볼 수 있다.
제주 오설록에 조성된 제주 특유의 지형을 살린 개인주택 ‘모헌’의 중정 정원에 담긴 깊은 숲의 풍경, 남해 ‘사우스케이프’, 여섯 번째 묶음 ‘하천 풍경과 생태의 회복’은 강이 흐르는 곳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습지를 보호하고 도심 속 물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작업인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선유도공원’, ‘파주출판단지’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 혹은 딱딱한 건축물 속에서 나무와 숲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은 작가의 감각 뿐 아니라 ‘땅을 읽어내는’ 독특한 작업 철학이 빚어낸 명작이다. 마지막 일곱 번째 묶음 ‘식물, 삶의 토양’은 국립수목원 설계 청사진과 완도식물원 조감도 등을 담았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