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한 체구에 단정한 머리를 한 여성이 너비 5m 크기의 거대한 캔버스 앞에 섰다. 스피커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작가의 붓놀림은 음악과 어우러져 마치 춤을 추는 듯하다. 주변 공기와 관람객들의 숨소리도 붓의 방향을 결정하는 요인이다. 일본 멜로드라마에서 튀어나온 듯한 단아한 표정의 작가는 어느새 강렬한 힘을 내뿜으며 캔버스를 유화물감으로 가득 채운다.
이달 5일 일러스트레이션 전문 전시 공간 알부스갤러리에서 진행된 일본 그림책 작가 미로코마치코의 라이브 페인팅 퍼포먼스 현장이다. 국내 유명 그림책 작가 등을 포함해 70여 명의 관람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 이날 행사에서 미로코마치코는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거대한 캔버스를 빨강·노랑·파랑 등 각양각색의 물감으로 채워나갔다. 아이 손을 잡고 함께 전시장에 온 관람객들은 연신 ‘와’ 하는 탄성을 내지르며 작가의 퍼포먼스를 지켜봤다.
미로코마치코는 ‘늑대가 나는 날’ ‘흙이야’ 등의 그림책으로 국내에서도 두터운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 유명 그림책 작가다. 2012년 ‘늑대가 나는 날’로 제18회 일본그림책대상을 수상한 후 아시아를 기반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다. 작가의 그림책은 주로 살아 있는 것들에 주목한다. 지구에 자리 잡은 생명체들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거친 붓질과 다양한 색으로 표현한다.
그림책과 마찬가지로 대형 라이브 페인팅에도 기승전결의 스토리 흐름이 필요하지 않을까. 라이브 페인팅 퍼포먼스 내용과 관련해 어떤 계획을 세우는지 묻자 작가는 “거의 대부분의 작품 스토리는 일상에서 떠오르는 이야기에서 발굴한다”며 “그림을 그릴 때 어떤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즉흥적으로 자유롭게 그려 완성한다”고 말했다. 그는 “라이브 페인팅을 할 때는 항상 음악을 틀어 놓고 당시의 느낌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며 “그림을 그릴 때 관객들의 표정, 공기 등이 얽혀 함께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작가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자유로운 영혼의 분위기는 그의 삶에서 나온다. 오랜 시간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에서 작업 활동을 해온 작가는 몇 해 전 일본 아마미오섬으로 이주해 살고 있다. 섬 생활에는 특별한 계획이 없다. 정원을 가꾸고, 밭일을 하다 생각이 나면 작품을 제작한다. 작가는 “바뀌는 날씨와 환경에 나를 좀 더 맡겨야 한다”고 섬 생활에 대해 부연했다.
섬은 도시 생활로 잊고 지냈던 작가의 감각을 일깨운다. 작가의 삶이 곧 그림이 되고, 살아 있다는 감정이 다시 작품으로 연결되는 선순환인 셈이다. 작가는 우물·나무·진흙 등 자연 재료를 사용해 자신만의 감각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를 생생하게 증명한다.
‘일렁이는 섬의 생명체들’이라는 제목으로 6월 9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작가가 그동안 걸어온 그림책 세계부터 섬에 이주해 살기 시작한 후 바뀐 새로운 시각을 모두 모아 선보인다. 작가의 첫 한국 개인전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번 한국 전시를 위해 대형 캔버스 작품을 특별히 제작해 지상 2층에 전시했다. 아마미오섬에서 자연의 일부로 지내며 포착한 장면을 담은 다양한 규모와 형태의 다른 회화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그간 출간된 그림책 중 4권의 원화를 선보이며 아직 국내에 출간되지 않은 화집 속 원화 60점도 공개한다.
그는 “지하 1층에서 지상 3층까지 전시가 진행되는데 그림책뿐 아니라 그간 펼쳐왔던 예술 활동 전반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며 “이곳에서 작품 그대로를 느끼며 자유로운 마음을 가져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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