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미국 국빈방문에 맞춰 10일(현지 시간) 열리는 미일정상회담에서 양국은 군사·안보·경제 등을 아우르는 전면적인 협력 관계를 선포한다. 미일 양국은 기존 동맹 관계를 강화하는 수준을 넘어 훨씬 강하고 폭넓은 차원으로 업그레이드된 동맹을 구축한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양국 안보 동맹이 대폭 강화되고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의 ‘대(對)중국·북한 견제 역할’이 커지면서 일본이 앞으로 ‘보통국가화’, 즉 전쟁 가능한 나라로의 전환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9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가진 브리핑에서 “(기시다 총리의 국빈방문은) 미일 동맹을 재정비하고 새롭게 활기를 불어넣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며 “두 정상은 미일 동맹의 높은 야망을 부각할 것”이라고 밝혔다.
백악관 측은 두 정상이 우주 협력 관련 성과물을 비롯해 인공지능(AI)·양자컴퓨팅·반도체·청정에너지 등에 대한 핵심 기술 영역에서 파트너십을 발표할 것이라고 소개했다. 설리번 보좌관은 “정상회담을 통해 국방 안보와 기술, 우주 분야는 물론 기후변화에 대한 경제 투자에 이르는 광범위한 논의를 진행할 것”이라며 “두 나라 국방 능력에 대한 조율과 통합을 더 훌륭한 수준으로 높이고 최적의 태세를 확보하며 같은 입장에 있는 다른 동맹 국가들과 연계한 방위 협력 강화 조치를 발표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설리번 보좌관은 특히 이번 정상회담을 통한 안보 체제 강화에 한국도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우리의 기술·산업·경제 역량 등과 관련해 한미일 3자 기반에서 시너지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덧붙였다.
외신들은 이번 회담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해상부터 우주에 이르는 현대적인 군사 동맹을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고 보고 있다. 앞서 미국·영국·호주의 안보 동맹인 ‘오커스(AUKUS)’ 국방장관들은 8일 “우리는 일본의 강점, 그리고 일본과 오커스 3국 간에 긴밀한 양자 국방 협력 관계를 인식하며 일본과 오커스 ‘필러2’의 첨단 역량 프로젝트 협력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영미권 국가들이 출범시킨 오커스가 일본을 통한 외연 확장을 공식화한 것으로 조 바이든 행정부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미국·호주·인도와 함께 다자 안보 협의체 ‘쿼드(Quad)’에 참여하고 있는 일본은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가장 핵심적인 국가로 부상하고 있다. 오커스는 첨단 군사기술을 공동 개발하는 협력체에 한국을 파트너로 포함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요미우리신문은 HGV 탐지를 위한 일본의 저궤도 위성망 구축에 미국이 협력하기로 했다고도 보도했다. HGV는 음속의 5배(마하 5) 이상 속도로 저공비행해 탐지와 요격이 쉽지 않은 미사일로 북한과 중국이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주일미군에 대한 미국의 지휘권 조정도 이뤄진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국가안보회의(NSC) 동아시아 국장을 지낸 크리스토퍼 존스턴은 “만약 중국이 대만을 공격한다면 미국과 일본은 이에 공동으로 대응해야 한다”며 “일본이 실질적인 작전 지휘권을 갖춘다면 실시간으로 군사작전을 조정할 수 있는 훨씬 나은 대응 능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회담 이후 일본의 도요타가 미 항공우주국(NASA)의 달 탐사선 제작에 참여한다는 발표가 나올 것으로 알려졌는데 일본 우주비행사가 비(非)미국인 중 최초로 달 탐사 임무에 참여한다는 내용이 포함될 것으로 전망된다.
미일정상회담에 이어 11일 열리는 미·일·필리핀 정상회의에서는 해상과 사이버 안보 분야 협력에 대한 새로운 이니셔티브(구상)도 선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번 정상회담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동맹과 파트너십의 이른바 ‘격자형 안보 구조’를 강화하기 위한 바이든 행정부의 노력을 보여주는 최신 사례”라며 “이는 명백히 중국에 보내는 신호”라고 평가했다. 일부 거점 동맹국을 중심으로 하는 이전 대응 방식에서 벗어나 여러 동맹·파트 국가들과 다양한 소다자 협력체를 통해 대중국 견제와 압박의 촘촘한 망을 짜는 구상이라는 얘기다.
정상회담에 앞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을 방문한 기시다 총리를 극진히 예우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백악관 문 앞에 나와 기시다 총리를 맞이한 자리에서 악수를 나눴고 질 바이든 여사는 기시다 유코 여사를 포옹하며 친밀감을 나타냈다. 바이든 대통령 부부는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회사를 운영하는 일본계 미국인이 손으로 만든 다리 3개짜리 탁자를 기시다 총리에게 선물했다. 탁자는 미국 토종 수목인 검은 호두나무로 만들었으며 공식 방문을 기념하는 명패가 포함됐다. 또한 미국 유명 가수 빌리 조엘이 사인한 석판화와 LP판 세트, 미국을 상징하는 가수들의 노래를 담은 빈티지 레코드판을 가죽 상자에 넣어 선물하며 극진히 예우했다. 질 여사는 유코 여사에게 미국 여자대표팀과 일본 여자대표팀의 사인이 담긴 축구공을 선물했다.
기시다 총리는 바이든 대통령과의 만남에 앞서 미국 기업인들과 만나 일본 투자를 촉구하는 등 실리 외교에 나섰다. 기시다 총리는 “미국 기업들의 투자는 일본의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할 것이고 일본의 성장은 일본의 대미 투자를 늘리는 데 필요한 자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자리에는 IBM과 화이자·보잉·마이크론·웨스턴디지털 등 미국 기업들의 고위 경영진이 참석했다. 기시다 총리를 별도로 만난 브래드 스미스 마이크로소프트 부회장은 앞으로 2년간 29억 달러를 일본에 투자해 클라우드컴퓨팅과 AI 사업을 강화한다고 발표했다.
한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이날 중국을 방문 중인 마잉주 전 대만 총통을 만나 “양안의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양안이 같은 나라에 속한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며 “그 어떤 외세의 간섭도 가족과 조국의 재결합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대만 독립을 반대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강조하는 한편 바이든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의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견제구를 날린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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