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갓 마흔을 넘겼지만 젊은 작가 이광호의 경력은 화려하다. 2007년 홍익대학교 금속조형 디자인과를 졸업한 후 20대에 펜디를 시작으로 디올, 에르메스, 조말론 런던, 스와로브스키 등 세계적인 브랜드와 협업하며 이름을 알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몬트리올 장식미술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홍콩M+미술관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로비에 설치돼 있는 의자와 조명 등도 그가 제작한 작품이다.
칠보, 매듭으로 대표되는 이광호의 작품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과 대구에서 동시에 열린다. 리안갤러리 서울은 이달 30일까지 현대미술작가 이광호의 개인전 ‘Yesterday Is Tomorrow’를 개최한다.
이광호는 PVC와 전선 등 공업용 재료를 손으로 일일이 꼬아 조명·가구·오브제를 제작하는 디자이너다. 2011년 재료를 꼬아 작품을 만드는 작업 과정을 명품 브랜드 펜디의 글로벌 프로젝트 부스에서 퍼포먼스로 선보인 후 전세계 유수 기관의 러브콜을 받게 됐다. 세계적인 브랜드와 미술 기관은 이광호 작업의 어떤 부분에 매력을 느낀 걸까.
작가는 이번 서울과 대구 전시에서 동판에 틈을 내 칠보를 끼워 넣는 방식으로 제작한 작품을 선보인다. 칠보는 금속을 장식하는 전통 예술 기법. 작가는 4년 전 같은 공간에서 ‘칠보’라는 미디엄의 위엄을 알리는 데뷔 무대를 가졌다.
2021년에는 리안갤러리 대구 개인전에서 공업용 재료를 꼬아 만드는 ‘매듭’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실험 무대를 선보였다. 이번 전시에서 이광호는 기존의 작품을 결합하고 다시 이를 파괴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구현된 작품을 소개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아모레퍼시픽 본사에서 본 감각적인 디자인의 의자 대신 찌그러진 금속 상자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관람객은 금속들과 천장을 연결한 줄을 이리저리 피하며 걸어 다녀야 한다. 금속 상자의 질감은 놀이공원에서 본 공룡의 피부 혹은 먼 행성에서 날아온 운석의 조각을 연상케 한다. 작품의 제목은 ‘적동과 칠보’. 구리와 칠보를 혼합해 만든 이 작품은 작가의 신작이다.
작가는 그간 붉은 구리를 가마에 굽고 그 위에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칠보를 입혀 작업해 왔다. 현장에서 만난 작가는 “구리는 단단해 보이지만 비를 맞으면 색이 변하고 열을 가하면 물러지는 연약한 재료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재료”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동판에 칠보를 끼워넣는 기존 작업 방식을 지우고 구리에 칠보를 덧입혀 몇 번이고 가마에 굽는 새로운 방식을 선보인다. 신작은 작품을 수십 차례 던지고 밟아 찌그러뜨리며 작가의 모든 체력을 쏟아 넣은 후에야 완성된다. 칠보를 몇 번이고 덧입혀 각 조각마다 다 다른 색이 나오도록 한 것도 이번 전시의 새로운 볼거리다. 작가는 “던지고 밟고 찌그러뜨리는 과정에 많은 에너지가 들었다”고 말했다.
관람객은 이 공간에서 구리줄과 연결된 찌그러진 구리 상자를 피하며 마치 우주 공간을 산책하는 듯한 묘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전시공간 안에 들리는 빗소리 때문이다. 작가는 ‘디졸브 시리즈’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노이즈, 특히 가마 안에서 구리가 구워지면서 박피되는 소리를 전시장의 배경음악으로 재가공했다.
그 동안 작가는 실용적인 디자인 오브제나 조형적인 설치 작업을 선보여왔다. 하지만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는 상품 미학의 비탈길을 벗어나 디자인 문법으로부터 한 층 자유로워지는 것을 택했다. 공예가 아닌 현대미술 장르로 본격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전시는 4월 2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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