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의 최신 기술 흐름을 확인할 수 있는 최대 정보기술(IT) 전시장인 미국 캘리포니아주 모스콘 센터. 샌프란시스코에 자리 잡은 모스콘센터는 지난 해부터 성별로 나뉘어있던 화장실의 구분을 없애고 모든 젠더가 접근할 수 있는 화장실로 접근성을 높였다. 이 곳에서 볼 수 있는 어색한 장면 중 하나는 화장실 칸막이에서 나온 이들이 남녀 상관 없이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 광경이다.
양쪽으로 나뉘어 있지만 구분 없는 출입구를 무심코 들어오려다 세면대 앞에서 남녀가 함께 손을 씻는 모습에 놀라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일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성소수자(LGBT) 진영에서 동등한 화장실 접근권을 주장하며 벌인 오랜 투쟁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LGBT가 주요 의제로 내세웠던 화장실 접근권은 미국 사회에서 어느 순간 LGBT의 정체성 싸움의 필수 조건으로 변모하는 데 이르렀다.
2016년 페이팔의 창업자인 피터 틸은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 대회 무대에 올랐다.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지지하는 연설을 편 틸 창업자는 동성애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언급했다. 그는 “어렸을 때는 소련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지 놓고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며 “하지만 지금 우리는 누가 어떤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는지 논쟁을 하고 있다. 이것은 진짜 문제를 방해하는 논쟁일 뿐”이라고 목소리를 냈다. 공화당 진영에서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례였지만 오히려 그는 LGBT 진영에서 비난을 받았다. 범 공용 화장실(Trans Restroom)로 상징되는 동성애자 정체성을 부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국의 언론인이자 정치 평론가인 저자 더글러스 머리는 ‘군중의 광기(The Madness of Crowds)’를 통해 극단으로 흐르는 정체성 정치를 비판한다. 그는 동성애자의 권리를 내세우는 운동이 폭주하면서 이제는 평등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주장을 내세우게 됐다는 불편한 이야기를 꺼낸다. 동성애자는 어떤 의미에서 이성애자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논쟁의 암묵적인 전제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 보호를 넘어 ‘소수가 옳고 선하고 우월하다’는 의식이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이 같은 전제를 부정하면 누구든 쉽게 공격당하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다수가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는 동성애 뿐만 아니라 여성, 인종, 트랜스젠더 등 사회적 소수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까지 다룬다. 할리우드 거물인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을 폭로한 ‘미투(Me too)’ 운동 이후 ‘유독한 남성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부지불식간에 일반적인 관념처럼 사용되는 것이 그 예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이 마주하는 ‘자기 모순’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권력자인 남성에 대해서는 비판하지만 여성 스스로도 젊음, 신체적 매력 등을 권력으로 삼을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를 간과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알고리즘의 세계에서 소수자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빅테크의 ‘머신러닝 공정성’이 현실과 사회를 왜곡하는 데 이르렀다는 논리도 편다. 소수자의 다양성을 중시하는 실리콘밸리에서 활동하는 빅테크 기업들이 현실을 왜곡하는 비율로 검색 결과를 제시하는 것이 그 예다. 이를 테면 구글 검색 창에서 ‘서양 예술’을 검색할 경우 흑인이 인물로 등장하는 작품이 상위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의 서양 예술 분포를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저자는 모든 것을 정치화하려는 정체성 정치의 경향 자체를 탈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인간 상호 작용의 모든 측면을 정치의 문제로 돌리는 것 자체가 플랫폼에 도착한 기차가 궤도를 이탈해 폭주하는 것과 같은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주변부 문제가 목숨을 좌우하는 문제가 되는 것을 경계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성별과 젠더, 피부색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은 문제지만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경우 끝이 없는 분열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2만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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