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정치적 성과로 부각하려 했던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탈출 선언’을 당분간 보류할 방침으로 알려졌다.
2일 아사히신문은 고물가에 국민 부담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섣부른 디플레이션 탈출 선언이 외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판단한 기시다 총리가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실제 일본은 물가 상승률이 2년 연속 목표치인 2% 이상을 웃돌고 있지만 임금 인상 움직임이 중소기업 전반으로 확산되지 않았고 물가를 반영한 실질임금이 23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 경제는 1990년대 초 거품 경제 붕괴 후 물가 하락, 기업 실적 악화, 임금 상승 정체, 개인소비 부진 등이 악순환되는 처지에 놓였다. 일본 정부는 2001년 3월 처음으로 “일본 경제가 완만한 디플레이션에 있다”고 인정했고 이후 역대 정부의 최대 관심사는 ‘디플레이션 탈출’에 모아졌다. 2013년 아베 신조 정권에서는 디플레이션 탈출의 목표로 2% 이상의 안정적인 물가 상승을 내걸었다.
지표만 놓고 보면 지금이 ‘탈(脫)디플레이션 선언’의 적기다. 일본 소비자물가는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세계적인 원자재 가격 상승과 엔화 가치 하락 등으로 2% 이상 올랐다. 또 올해 봄철 노사 임금협상(춘투)에서 대기업들이 5% 넘는 임금 인상을 단행한 데다 주식시장도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면서 디플레이션 탈출에 대한 기대감이 확산했다. 기시다 총리도 “디플레이션으로부터 탈출하는 천재일우의 역사적 기회”라고 말해 정책 전환을 시사했다. 그러나 임금 인상이 전체 고용의 70%를 차지하는 중소기업 전반으로 퍼지지 않은 데다 실질임금 역시 2년 가까이 마이너스 성장(전년 동월 대비)을 보이고 있어 불안 요소가 여전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총리 관저 간부는 “디플레이션으로 돌아가는 지표가 나왔을 경우 리스크가 크다는 판단도 있다”면서 ‘탈디플레이션 선언’을 유보한 배경을 밝혔다. 최근 한 민간연구소 분석에서는 엔저 심화로 달러당 170엔이 될 경우 당초 하반기 플러스로 전환될 예정이던 실질임금이 마이너스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나왔다.
시장에서는 정부가 탈인플레이션을 선언할 환경이 마련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고 있다. 아사히는 소식통을 인용해 “총리가 (6월) 1인당 4만 엔의 정액 감세로 가처분소득이 증가하고 내년 춘투에서도 임금 인상을 확인할 수 있으면 탈디플레이션을 선언할 여건이 갖춰진다고 말했다”며 내년 봄 선언에 대한 의욕을 숨기지 않았다고 전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총리가 올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이길 경우에나 가능한 시나리오다. 기시다 내각 지지율은 반년 넘게 20%대의 저조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달 28일 진행된 3개 지역 보궐선거에서는 야당인 입헌민주당에 3석을 모두 내주는 참패로 당내에서도 ‘기시다로는 싸울 수 없다’는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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