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세계가 주목하는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배경에는 유능한 경제 관료들이 있었습니다. 시대가 탁월한 경제 관료를 낳았고 그들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했습니다.”
고도성장기를 이끈 13명의 경제 관료의 생애와 정책을 조명한 ‘경제관료의 시대’ 저자 홍제환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13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책에 등장하는 경제 관료들은 빈곤 탈출과 경제 발전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사명감과 헌신, 열정으로 이뤄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고도성장의 성과를 평가할 때 경제 관료의 역할이 중요했음에도 소홀히 다뤄지는 측면이 있다”며 “해방 이후 혼란과 전쟁부터 빈곤과 인플레이션, 1970년대 오일 쇼크에 이르기까지 숱한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성장을 일궈낸 그들의 공적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경제관료의 시대’는 시장 자유주의를 주창하는 경제학자들이 학계와 산업계, 관계 등에서 요직을 차지하며 세계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40년(1969~2008년)을 뉴욕타임스가 ‘경제학자의 시대’로 규정한 데서 따왔다고 했다.
한국 경제사를 전공한 홍 연구위원은 “고도성장기는 통상 1960~1970년대를 일컫지만 경제 개발 과정의 앞뒤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1950년대 재건의 기틀을 마련한 백두진(재무부 장관·총리)과 송인상(부흥부·재무부 장관)을 다뤘고 1980년대 초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까지 넣었다”며 “그 이후에는 외환위기 직후 이헌재 재정경제부 장관 외 주목할 만한 인물도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예산권+부총리 승격한 EPB, 장기영 때 ‘경제컨트롤타워’
현재 기획재정부의 전신으로 1961년 탄생한 경제기획원(EPB)의 경제사적 의미를 물었다. “경제개발기구가 성공하려면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기획과 예산 기능이 합쳐져야 하고 경제 부처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경제정책 컨트롤타워로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EPB의 전신이 부흥부인데 기획만 있고 예산 기능이 없었습니다. EPB는 그에 부합하는 형태를 취했기에 경제 개발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이죠.”
주목되는 건 당시 이한빈 재무부 차관이 예산권의 EPB 이관에 발 벗고 나섰다는 점이다. 홍 연구위원은 “예산 업무라는 막강한 권한을 다른 부처에 넘겨주면 재무부의 위상이 약화되는데도 이 차관은 예산권 이관을 주도해 나갔다”며 “부처 이익보다 경제 전체를 먼저 생각했다는 것은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EPB가 처음부터 컨트롤타워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1963년 말 부총리급으로 격상되고 임기 5개월로 단명에 그친 초대 김유택 부총리에 이어 등판한 장기영 부총리(1964년 5월~1967년 10월) 때부터 명실상부한 경제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1963~1964년은 우리나라 현대 경제사의 변곡점이 됩니다. 우리 경제가 수출 주도형 경제로 방향을 바꾼 시기죠. 1963년 경공업 제품 수출이 급증하면서 ‘우리도 수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고 정책 역량을 쏟아붓습니다. 이런 ‘기회의 창’을 장기영 경제부총리가 제대로 포착한 것이죠.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한 게 1964년입니다.”
당시 ‘기회의 창’에 대해 홍 연구위원은 “선진국은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미국에 소비재를 수출하던 일본도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수출 수요가 급증했다”며 “1차 경제개발계획(1962~1966년) 원안에서 미미했던 공산품 수출 목표액은 1964년 수정안에서 여섯 배로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왕초’ ‘불도저’로 불리던 장기영은 고졸 출신임에도 당대 최고의 엘리트 집단인 한국은행에서 부총재까지 맡은 뒤 서울경제신문·한국일보를 창간하고 경제부총리,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등을 지냈다. 홍 연구위원은 그에 대해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했던 당시 우리 경제 상황을 고려하면 불도저 기질이 있었던 장기영만큼 그 시대 경제 수장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며 “시대의 난관을 극복해가는 데 필요한 리더십과 추진력을 지닌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물가를 잡고 수출 주도형 경제구조로 전환해 고도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시대의 거인”이라고 덧붙였다.
주류경제학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한국의 정부주도 고도성장
홍 연구위원은 “대통령은 경제팀 수장으로 힘을 실어주기 위해 장기영에게 경제 부처 장관 임면권까지 상당 부분 보장해줬다”면서 “그가 지금도 회자되는 EPB 전성시대를 열고 뒤이은 김학렬이 완성했다”고 평가했다. 또 “1960년대 중반부터 경공업 중심의 수출 경제였다면 1970년대 중화학 주도 수출 경제는 청와대가 주도했다”고 덧붙였다. 핵심 인물은 한은 출신으로 재무부와 상공부 장차관을 모두 거쳐 최장수(9년) 비서실장을 맡았던 김정렴, 이공계 출신으로 중화학공업화의 설계자인 오원철 제2경제수석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김정렴은 재무부 차관을 끝으로 학계로 가려다 장기영 부총리에 붙잡힌 케이스다. 경제 부처 인사권을 사실상 행사한 장 부총리는 그를 상공부 차관에 발탁해 수출형 공업화 업무를 맡겼다. 상공 관료 경험은 70년대 비서실장 시절 중화학 공업화 정책을 펴는 토양이 된다.
‘정부 주도 성장이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모델인가’를 묻자 그는 1993년 세계은행(WB)의 ‘동아시아 기적’ 보고서를 소개했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시장 중심의 성장론을 중시하기 때문에 한국의 높은 성장률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며 “그래서 보고서는 정부가 시장에 개입했으나 ‘시장 친화적’ 정책을 폈다는 식으로 타협적인 결론을 냈다”고 전했다.
그럼 왜 현세대에는 걸출한 스타 관료가 없는 것일까. 홍 연구위원은 경제 환경의 변화를 꼽았다. 과거에는 경제 규모가 작았고 법과 제도 자체도 없던 시기이기에 정부와 관료의 역할이 컸지만 지금은 시장의 힘이 크고 경제구조가 성숙해 개인의 역량이 도드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장기영·김정렴·남덕우 같은 분들이 다시 태어나더라도 우리 경제의 난제를 해결하고 일취월장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라면서도 “분명한 건 한 세대를 풍미한 걸출한 경제 관료들의 남다른 소명감과 열정, 헌신이 있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영웅’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 연구위원은 “한국인 1호 코넬대 출신의 경제외교통 양윤세 EPB 외자총괄과장(훗날 동력자원부 장관)은 평전이 나오면서 뒤늦게 알려졌다"며 “이런 ‘숨겨진 영웅’을 발굴하고 조명하면 고도성장의 경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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