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골프 코스의 난도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지만 국내에 핀크스GC(파71)처럼 바람에 따라 180도 얼굴을 달리하는 곳은 많지 않다. 바람이 잔잔할 때와 기승을 부릴 때 완전히 다른 코스가 된다고 선수들은 입을 모은다.
16일 제주 서귀포의 핀크스에서 열린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SK텔레콤 오픈(총상금 13억 원). 요란하게 ‘쉬이’ 소리를 내며 코스를 휘감은 강풍에 선수들의 타구음이 묻혔다. 오전 내내 초속 9~10m의 바람이 불어닥쳤고 최대 14m의 돌풍이 수시로 선수들을 괴롭혔다. 이른바 빅네임들도 희생자 명단에 여럿 올랐다.
김비오는 2012년과 2022년 이 코스에서 이 대회를 우승한 ‘핀크스 사나이’. 2년 전 이 대회 사상 72홀 최소타 기록(19언더파 265타)을 작성했고 그해 7타 차로 대회 최다 타수 차 우승도 기록했다. 하지만 이날은 2번 홀(파3) 쿼드러플 보기를 포함해 7타나 잃고 78타를 적었다. 김비오는 “바람이 강해 힘들었다. 스스로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다”면서도 “어떤 상황이든 7오버파를 친 것은 잘한 게 아니다”라고 했다.
1오버파로 선방한 투어 통산 5승의 홍순상은 “그린 주변에서 바람 방향이 갑자기 바뀌기도 하고 순간 돌풍이 불기도 했다. 두 번째 샷의 거리를 맞추는 것과 긴 클럽으로 그린을 공략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면서 “이런 바람에서는 작은 실수라도 큰 사고로 이어지고는 한다. 나름 상위권에 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위”라며 웃었다.
김비오가 4타나 잃은 2번 홀은 이날 최악의 블랙홀이었다. 지난해 3승을 따내 다승왕에 올랐고 올해도 우승이 있는 고군택 또한 이 홀에서 속칭 ‘양파’보다 더한 쿼드러플 보기를 했다. 김비오는 물에 두 번 빠뜨렸고 고군택은 티샷을 물로 보낸 뒤 그린에서 3타를 더 잃었다. 이 홀에서 황중곤과 이준석·송민혁은 양파(트리플 보기)를 적었다.
지난해 GS칼텍스 매경오픈 우승자인 장타자 정찬민은 2번 홀은 파로 넘겼지만 13번 홀(파4)에서 무려 6타를 까먹었다. 규정 타수보다 6타를 더 치고 홀아웃하는 것을 섹튜플 보기라고 한다. 티샷이 오른쪽으로 어긋난 뒤 러프를 전전한 끝에 8타 만에야 그린에 올렸다. 정찬민은 이후 경기를 다 마치기 전 기권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핀에 가까이 붙인 ‘굿샷’이 나오면 평소보다 훨씬 큰 환호와 박수가 터졌다. 문경준(3오버파)은 16번 홀(파5)에서 칩인 이글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린에서 볼이 잘 멈추지 않는 상황이 쌓일 경우 KPGA 투어는 경기위원회 재량으로 경기 중단을 선언한다. 이날은 강력한 바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린에서는 볼이 얌전했다.
어지러운 스코어카드가 난무한 가운데 오후 들어서는 시간이 갈수록 바람 세기가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 선수들은 재빨리 버디를 챙겼다. 그 가운데는 ‘레전드’ 최경주도 있었다. 1번 홀(파4) 3m에 가까운 버디로 출발한 최경주는 4번 홀(파5) 어프로치 샷을 핀에 바짝 붙여 두 번째 버디를 잡았다. 버디 3개와 보기 3개의 이븐파. 선두와 1타 차의 공동 2위다.
이 대회 최다 우승자(3회)인 최경주는 올해도 3라운드에 진출하면 최다 컷 통과 기록을 스물 한 번으로 늘리게 된다. 바람이 적을 것으로 예상되는 2라운드에도 경쟁력을 보여주면 우승에 대한 기대까지 키울 수 있다. 최경주는 13일 미국 앨라배마주에서 끝난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챔피언스 메이저 대회 리전스 트래디션에서 공동 6위를 하고 이 대회에 참가했다. 유일하게 언더파 스코어를 낸 김진성이 1언더파 선두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