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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예정된 전쟁' 그 포화 속으로

정민정 국제부장

美 중국산 전기차 등 최대 100% 관세

中 '중국판 슈퍼 301조' 맞대응 보복

'투키디데스 함정' 치닫는 미중 갈등

높아진 韓위상 지렛대로 국익 도모해야

정민정 국제부장




2015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두 나라 사이에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패권국과 도전국 간 구조적 긴장을 뜻하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안보 정책 전문가인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가 2012년부터 써온 표현이다.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으로 신흥국 아테네의 부상과 패권국 스파르타의 두려움을 지목한 데서 유래했다. 앨리슨 교수는 저서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에서 지난 500년 동안 신흥국과 패권국의 충돌이 총 열여섯 번 있었는데 열두 번은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고 짚었다. 이어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과 중국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열일곱 번째 사례이며 최악의 경우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시 주석이 집권한 2012년 이후 중국은 ‘기술 굴기’를 내세워 전 분야로 뻗어나갔고 급기야 미국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현실적인 적으로 부상했다. 2022년 시 주석은 사실상 장기 집권의 틀을 다지며 수십 년을 내다보고 정책을 추진할 동력까지 확보했다. 시 주석의 관점에서 중국이 패권국으로 올라서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장강(長江)의 물결’이다.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거세지는 미중 무역 전쟁은 그런 의미에서 ‘예정된 전쟁’이다. 패권을 지키고자 하는 미국의 의지와 패권을 위협하는 중국의 도전이 팽팽히 길항하기 때문이다. 이미 세계는 전쟁의 포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미국은 이달 14일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관세를 현재 25%에서 100%로 대폭 인상하기로 했다. 범용 반도체와 태양광 전지, 배터리 등 전략산업과 관련된 제품의 대중국 관세도 2~4배 올린다. 장강의 물결을 자처하는 중국은 ‘강 대 강’ 전략으로 맞선다. 통상 압박에 대한 보복으로 자동차 관세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미국·유럽산 플라스틱 반덤핑 조사에 들어간 데 이어 ‘틱톡금지법’ 통과를 주도한 미국 정치인에 대해서는 입국 제한 조치까지 취했다. 보복 관세를 부과할 관세법도 개정했다. 미중 무역 전쟁은 거칠고 복잡해지는 양상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간 세계경제를 지배해온 자유무역 질서가 저무는 수준을 넘어 붕괴 직전”이라고 논평했다.





한국 입장에서는 교역 1·2위 국가의 무역 전쟁은 예기치 못한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중국 제품의 미국 수출이 감소하면 한국의 대중 중간재 수출은 줄어들고 중국에 공장을 둔 우리 기업들도 어려움을 겪는다. 미국은 대중 제재 동참을 노골적으로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늘어난 한국의 대미 흑자나 주한 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 카드 등을 내밀며 압박해오면 우리의 선택지는 좁아진다.

‘예정된 전쟁’이 몰고올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들이다.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 이익을 어떻게 확보할지, 경제안보 관점에서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할 때다. 그런 차원에서 최근 워싱턴 정가에서 흘러나오는 소식들은 중요한 힌트를 준다. 미국 고위 당국자들이 관세 인상안 발표를 앞두고 우리 측에 “관세 인상은 중국을 겨냥한 것이다. 한국 기업에 지장을 주는 사안이 있다면 알려달라”고 당부했다는 후문이다. 관세 조치를 담은 성명에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특정 태양광 제조 장비에 대한 제외를 우선시하라’고 지시했다”는 문장이 추가됐다는 말도 들린다. 바이든 대통령이 언급한 중국산 특정 태양광 장비를 쓰는 곳은 사실상 우리 대기업이 유일하다. 미국 대통령이 한국 기업을 배려했다는 해석이 나온 배경이다. 26~27일 한일중 정상회의가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2019년 12월 중국 청두에 이어 4년 5개월 만이다. 잃었던 중국 고리를 되찾을 절호의 기회다. 정치 리더십을 복원하고 정교한 외교력을 펼쳐 국익을 지키고 힘을 키워야 한다.



국제정치학자인 한스 모겐소는 저서 ‘국가 간의 정치’에서 “국제정치는 국가이익의 관점에서 정의된 권력을 위한 투쟁”이라고 규정했다. 책의 부제는 ‘힘과 평화를 위한 투쟁(the struggle for power and peace)’이다. 예정된 전쟁, 그 포화 속에서 힘과 평화를 지키기 위한 길고도 거친 투쟁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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