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무더운 여름날 필자를 비롯한 무사시노미술대학교의 미술사학과 박형국 교수, 조각과 쿠로가와 히로다케(黒川弘毅)교수, 사진담당 이정훈 일행은 뉴욕 브룩클린에 사는 이선자를 만나러 갔다. 이화여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한 이후 조각을 배우고 싶었던 선자 학생은 1966년부터 1967년 미국으로 유학하기 전까지 권진규에게 조각을 배웠다. 당시 권진규는 재료를 구입해 선자 학생과 같이 나눠 사용하기도 했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상황은 권진규가 스승이었던 시미즈 다카시로부터 조각칼을 받았던 것처럼 권진규는 선자 학생에게 조각칼을 선물로 주었다는 사실이다. 선자는 이를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다가 이후 권진규의 먼 친척이자 같이 미술을 배웠던 권옥연의 딸, 권이나에게 보내주었다고 한다. 선자 학생은 친구였던 남명자, 최명자 등과 함께 권진규의 작업실에 자주 모였으며 이들 역시 모델이 되어 권진규의 작품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선자를 모델로 남긴 작품은 권진규가 자신의 모습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이 제작한 주제 중 하나다. 석조를 비롯해 여러 점의 테라코타도 제작했는데 어떤 작품은 정확하게 ‘선자’라는 작품명을 명명하였으나 어떤 작품에는 이름으로 제목을 붙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표현의 독특한 처리로 인해 선자로 추정되는 작품들이 꽤 있다. 권진규는 늘상 모델과 작가와의 관계를 ‘모델+작가=작품’이라고 설명하면서 모델의 내적 세계를 투영하여 작품에 담고자 했으므로 모델에 대해 잘 아는 만큼 작품을 더 잘 만들 수 있다고 믿었으며 실천에 옮겼다. 따라서 인물상을 집중적으로 제작하던 1960년대 중반에는 자신의 제자, 지인, 나아가 권진규 자신을 작품의 주요한 주제로 다루었다. 작품 ‘선자’는 이러한 배경 아래 탄생했다. 모델을 잘 아는 만큼 권진규는 돌, 테라코타, 석고 등 여러가지 재료를 이용해 다양한 조형을 실험했다.
이 작품에서 눈여겨 봐야 할 점은 바로 돌이라는 재료다. 권진규가 석조를 접했던 시점은 이미 어릴 적부터일 것으로 짐작되는데 고향 함흥에서 불상·석탑·성곽 등 다양한 전통유산들을 봤을 것이며, 1940년대 후반 독학으로 조각을 공부하면서 이미 석조 조각 방식에 대해 인지했을 것이다. 무사시노 미술대학 동창들의 증언에 따르면 권진규는 1951년부터 석조 작업을 시작했는데 권진규의 재학 당시 전공과정 중 석조 수업이 없었으므로 혼자 작업했다고 한다. 스승인 시미즈 다카시가 권진규의 돌 작업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음에도 불구하고 권진규는 지속적으로 돌 작업을 했으며 1952년부터 55년 사이에 일본 재야미술전시인 이과전에 석조작업을 출품해 입선과 특대를 연이어 수상했다. 이러한 권진규의 노력과 성과는 이후 학내에서 인정받게 되어 무사시노미술대학 내에 석조를 다루는 정식 수업이 개설됐다.
2010년 이선자를 만나러 갈 때 인터뷰 했던 권진규의 후배인 윤창섭(일본명 마키노 에이(牧野 英) 1920년 서울서 태어나 1951년 도일 후 무사시노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일본명으로 활동하다 1980년대 말 도미) 역시 처음부터 석조에 관심이 있어서 학교에서 배우려고 노력했지만 좋은 재료를 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고 동급생보다 훨씬 나이많은 형이자 유일한 한국인 유학생 동지로서 권진규의 석조 작업은 매우 좋은 자극이 되었다고 증언했다.
이 작품은 화강석을 이용해 양감을 최대한 표현한 작품인데 인물의 세부 표현을 적게 해 마치 마무리가 덜된 듯한 인상을 풍긴다. 권진규는 석조에 있어서 돌의 형태를 반영함과 동시에 인체의 양괴감을 최대한 살리는 방식을 추구하였기에 인물 자체의 묘사가 중요한 목표는 아니었다. 또한 1950년대부터 추상미술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바 1960년대 작품에서는 과감하게 형태를 단순화하거나 질감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이상적인 형태감을 추구했다. 더욱이 권진규가 채택했던 주로 사용했던 재료들은 돌, 청동, 테라코타 등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조각의 전통적인 재료들인데 작가는 작품을 통해 영원한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으로서 ‘재료’를 선택했다. 작품이 제작된 지 60여년이 지난 오늘날 작가와 작가를 둘러싼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는 가운데 작품만이 고요하게 빛을 발하고 있으니 권진규의 예술관은 성공적이었다 말할 수 있을까. ‘선자’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1층 개방수장고에 출품돼 있다. / 류지연 국립현대미술관 미술품수장센터운영과장
★권진규 : 1922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으며 1947년부터 1948년까지 속리산 법주사 대불제작에 참가했고, 성북동회화연구소에서 미술을 배웠다. 1948년 일본으로 건너가 1949년부터 1953년까지 무사시노미술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당시 최고 권위의 공모전 중 하나인 ‘이과전’에 1952년부터 1955년까지 출품했으며, 1958년 일양회에서 일양상을 수상해 회우로 추천됐다. 1959년 귀국해 숭례문 중수사업에 제도사로 참여했고 1962년 ‘성웅 이순신’을 시작으로 하여 여러 영화의 무대 제작 및 특수효과를 담당하기도 했다. 1965년 신문회관에서 제1회 개인전, 1968년 도쿄 니혼바시 화랑에서 제2회 개인전을 개최했다. 당시 ‘애자’와 ‘춘엽니’를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 기증했다. 1971년 명동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1973년 고려대학교 박물관 현대미술실 개관전에 자화상을 비롯한 여러점을 출품했으며 이를 본 후 자결했다.
▶▶필자 류지연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품수장센터운영과장이다. 1996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입사해 전시기획, 미술관교육, 소장품연구, 레지던시, 서울관·청주관 건립TF 등 미술관에 관한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며 29년째 미술관을 지키고 있다. 영남대 미학·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영국 에식스대학교(Essex University)에서 미술관학(Gallery Studies)을 공부했으며, 서울대에서 미술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겸임교수(2022~2023)를 비롯해 인천시립미술관·대구미술관 자문위원, 서울문화재단 전시 자문위원, 예술경영지원센터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브 자문위원, 성북문화원·대안공간 공간291 지문위원, 증도 태평염전 아티스트 레지던시 심사위원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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