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은 더 이상 당신에게 제공할 일자리가 없습니다.’
지난 해 1월 20일 금요일 아침 개인 이메일로 온 메일 한 통에는 이 같이 쓰여 있었다. 16년을 몸 담았던 회사가 보내는 ‘건조한’ 이별 통보였다. 구글 코리아에서 전무로 일한 뒤 미국 구글 본사에서 새롭게 글로벌 홍보 팀을 꾸렸던 정김경숙(로이스 김) 디렉터는 그렇게 ‘정리 해고’ 대상이 됐다. 회사 메일함에서 답을 기다리던 수백 통의 메일도, 구글 캘린더에 15분 단위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던 미팅들도 사라졌다.
외부 자극이 증발한 가운데 마음에서는 파도가 밀려 왔다. ‘왜 나였을까’ 분노가 일었다가 좌절이 왔다. 사흘째 되는 날 밤 짓누르던 감정에서 빠져나와 무작정 그간 해보고 싶었던 버킷리스트를 적기 시작했다. 망설임 없이 적어 내려간 첫 리스트에는 ‘트레이더 조(Trader Joe's)의 크루 되기’가 있었다. 트레이더 조는 특유의 가족적인 분위기로 사랑을 받는 미국의 로컬 유통 체인으로, 우리나라의 냉동 김밥과 주먹밥 등이 ‘완판’ 행렬을 일으키며 화제가 된 곳이다.
정김경숙 전 구글 디렉터는 최근 ‘구글 임원에서 실리콘밸리 알바생이 되었습니다’를 출간한 후 서울경제신문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트레이더 조에서 명찰과 유니폼을 받는 순간 ‘육체노동자, 시간제 노동자가 되는구나’를 실감했다”며 “정문 앞에서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들어가기로 한 순간이 스스로 구글 디렉터였다는 체면에서 벗어나 ‘알을 깬 순간’이었다”고 전했다.
“용기 내 큰 소리로 ‘안녕 모두들’하고 인사했어요. 다들 깜짝 놀라서 쳐다봤죠. 그렇게 모든 게 시작됐어요.” 이후 그렇게 승차 호출 서비스 앱 ‘리프트’의 라이더,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의 바리스타로 N잡러이자 월급 대신 주급을 받는 삶이 시작됐다. 실리콘밸리의 간판 테크 회사인 구글의 디렉터로 살아오던 그가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눈을 돌리게 된 순간이었다.
뼛속까지 마케터, 홍보인으로 살아왔던 그는 ‘월마트에서는 계산대에서 아무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데 트레이더 조에서는 왜 모두들 친구처럼 대화를 나눌까’ 오랫동안 궁금했다. 하지만 조직의 강점을 깨닫기도 전에 이곳은 ‘몸으로 일하는 곳’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됐다. 맨 몸으로 키 높이보다 높게 쌓아 올려진 200kg에 달하는 빵 상자를 장비로 들어 올리기 위해 멍이 들기도 했다. 달라진 건 육체노동자로도 살 수 있다는 자기 효능감이다.
그는 “오랫동안 지식노동자로 살아오다 보니 ‘나한테서 노트북을 빼앗아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의구심이 있었다”며 “‘50대에도 몸 하나로도 먹고 살 만큼도 벌 수 있고 저축도 할 수 있구나’하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후 6개월 만에 승진도 했다.
그는 실리콘밸리 아르바이트생 경험을 일종의 ‘은퇴 예행 연습 시간’으로 정의했다. 그는 “30년 간 일하면서 통신(모토로라), 제약(일라이릴리), 인터넷(구글)에서 일하면서 경험한 산업보다 다양한 산업군을 경험할 수 있었다”며 “내가 얼마를 벌면 인색해지지 않을지, 어떤 루틴이 필요한 지를 알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비슷한 상황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무작정 잠수를 타기보다는 네트워킹을 이어가고 자신만의 루틴을 확보하며 세상과 접점을 유지할 것을 추천했다. 가까운 사람이 이 같은 일을 겪게 될 때는 “너무 조심스럽게 대하지는 말되 스스로 일어날 수 있을 여유를 줄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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