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부산 영도구의 아이서울병원. 이른 아침부터 병원을 찾은 어린이 환자와 보호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백일해와 마이크로플라즈마 폐렴, 수족구 등 감염병이 영·유아 사이에서 빠르게 번지며 소아청소년과 진료 수요가 급증한 탓이다. 이창연 아이서울병원장(소아청소년과 전문의·아동병원협회 부회장)은 “어린이집, 유치원 등에서 집단생활을 하는 영유아가 늘어나면서 여름철에 걸맞지 않게 환자가 몰렸다”며 “받아줄 응급실을 찾지 못해 아동병원으로 떠밀려 오는 들어오는 중증 위급 환자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 소아과 전문의 부족하다더니…응급실 대신 아동병원으로 몰려
이 원장에 따르면 유례 없는 저출산과 저수가 문제가 맞물려 소아청소년과 기피 현상이 심화한 데 따른 여파로 일선 아동병원들은 소아 응급실로 전락한 지 오래다. 아동병원협회에 따르면 소아청소년과 진료를 전담하는 아동병원 중 상당수는 한국형 응급환자 분류도구(KTAS) 기준 3~5등급 수준의 환자 진료가 가능하다. KTAS는 캐나다의 응급환자 분류도구를 우리나라 의료상황에 맞게 변형시켜 개발한 중증도 판단 기준이다. 통상 1∼3등급은 응급이자 중증 환자군으로, 4∼5등급은 비(非)응급·경증 환자군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중증 및 위급도가 높아 상급병원 진료를 받아야 할 1~2등급 환자마저 전공의 부재 등 여건상의 문제로 인해 아동병원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서울병원이 있는 부산을 포함해 경남·울산 등 영남권은 소아 응급실 진료가 사실상 중단된 지 2~3년이 됐다. 고신의료원, 동아대병원, 부산대병원, 부산백병원 등 대학병원들은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부재 여파로 교수들이 격무에 시달리다 응급실 진료를 중단했다. 유일하게 해운대백병원이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를 별도로 응급실에 고용해 평일 진료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나마 주말에는 응급실 진료만 가능하다. 이 원장은 “600만 인구가 사는 영남권을 통틀어 소아 응급실 진료와 입원이 모두 가능한 의료기관은 양산부산대병원이 유일하다”며 “환자가 폭주해 진료가 제대로 이뤄지기 힘들다 보니 양산부산대병원 소아 응급실을 가면 경중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돌려보낸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 지방 소아 응급실 진료 구멍…중증 환자 내원하면 전원 부담에 ‘이중고’
비단 특정 지역만의 문제는 아니다. 협회에 따르면 전남·전북·광주 등 호남권의 경우 조선대병원은 이미 응급실 야간 진료를 중단했다. 전남대병원은 교수들이 야간 당직을 서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라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충청 권역은 대학병원이 8개나 되는 데도 경련, 뇌기능 이상 등 의식저하 소견을 보이는 중증 소아 환자의 응급 입원 전료가 가능한 곳은 1곳에 불과하다. 수용 가능한 응급실이 없어 환자가 구급자를 탄 채 뺑뺑이를 돌다 골든타임을 놓쳐 숨지는 일명 ‘응급실 뺑뺑이’ 사망 사건이 되풀이되는 이유다.
이러한 현실은 아동병원협회의 설문조사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협회가 지난 27~29일 전국의 아동병원 50곳을 상대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90%가량이 119구급차로 전원 오는 응급 환자를 수용하고 있었다. 구급차를 통한 응급 전원 건수를 물었을 때 한달에 5건 이하라는 응답이 56%로 가장 많았고 6~10건이 22%, 11~15건이 4%, 16건 이상이 6% 등의 순으로 조사됐다. 한달에 120건에 달하는 119전원 환자를 받았다는 응답도 있었다. 아동병원의 소아 응급실화가 이미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됐음을 실감케 한다. 구급차로 이송받은 환자 중 준중증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도 적지 않았는데, 이들을 다시 상급병원으로 전원 이송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응답은 72%나 됐다.
아동병원에서 수용 불가능한 중증 응급 소아 환자를 상급병원으로 전원시키려면 적게는 1건, 많게는 10건 넘게 전화를 돌려야 한다. 그 사이 소아청소년과 외래진료실에선 장시간 대기하던 환자 보호자들이 병원의 잘못인양 오인해 간호사들에게 불만을 터뜨리고 돌아가는 현상도 펼쳐진다.
이 원장은 “응급 환자 이송이 안되면 해당 환자에게 여러 명의 의사와 간호사가 매달리느라 현장이 마비될 뿐 아니라 자칫 환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법적 책임 문제까지 감당해야 하는 2중고를 겪는다”며 “소아 응급환자가 구급차에 실려 들어오면 일반 진료가 마비되다 시피 하다 보니 환자들이 장시간 대기하다 불만을 터트리고 돌아가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 내년 초 사태 더 심각해질라…“아동병원-소방청 대응체계 마련 시급”
현장에서는 아동병원의 소아응급실화에 대한 법적·정책적 대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머지 않아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컸다. 올해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지원자가 100여 명으로 정원(800명)에 크게 못 미친 데다 고년차 전공의가 수련을 마치는 내년 초가 되면 전공의 기근이 더욱 심해져 사태가 악화될 수 없다는 전망에서다. 이 원장은 “영남권, 충청권을 포함해 지방의 소아 응급 진료는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 분초를 다투는 위급 상황에서 전원 가능한 대학병원을 찾아 구급차를 타고 장거리로 이동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며 “올해 안에 대책을 마련해 조속히 시행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 시급한 해법은 소아 응급 환자가 발생했을 때 신속히 대응할 수 있도록 아동병원과 소방청 간의 대응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는 “아동병원들이 소아 응급환자 진료에 만전을 기할 수 있도록 인적 물적 기반 시스템 지원이 필요하다”며 “보건복지부 내에 소아청소년과 전담 부서를 신설하고 어린이들의 건강과 성장을 법적으로 보장해 줄 수 있는 ‘어린이 건강 기본법’을 제정하는 등 붕괴된 소아 진료체계를 되살리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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