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가 서울에서 열린다니 충격이네요. 정말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이화여대 도시농업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전민준(23) 씨는 탐스럽게 열매를 맺은 바나나 나무를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바나나 나무를 본 인도네시아 출신 교환학생 매슈 푸트라(19) 씨도 “인도네시아에서는 흔한 바나나가 한국에서도 자라는지는 몰랐는데 놀랍다”고 말했다.
이달 3일 서울경제신문이 방문한 서울 노원구 천수주말농장에는 녹색 이파리를 넓게 펼친 바나나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나뭇가지 중간에는 아직 익지 않은 바나나 두 송이가 열려 있고 가지 끝에는 사람 손바닥보다 큰 자주색 꽃송이가 늘어져 있었다.
기자에게 바나나 나무를 소개한 오영록(57) 노원도시농업네트워크 팀장은 “예전에 아이들을 가르칠 때 20년 후면 바나나도 열리고 침팬지도 돌아다닐 거라고 했는데 바나나는 열렸고 이제 침팬지만 있으면 된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오 팀장과 동료들이 노원구 도시농장에 바나나 나무를 심고 기르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10년 전 처음 바나나 나무를 심고 어미나무 주변에 새로 난 어린 순을 겨울이면 온실로 옮겼다가 이듬해 5월이 되면 다시 노지에 심는 과정을 반복했다. 우리나라 노지에서도 바나나가 열릴 수 있을지 궁금해 재배를 시작했다는 오 팀장은 “(재배) 7년 만에 꽃이 피더니 올해는 열매가 맺혀서 신기했다”면서도 “호기심에 시작했지만 열매가 열렸다고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탐스럽게 달린 열매를 보면서도 오 팀장이 걱정하는 것은 한반도의 기후변화다. 오 팀장은 “수치로만 보던 한반도의 기온 상승을 눈으로 확인한 것”이라면서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적응’과 ‘복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변화하는 환경에 어떤 작물이 잘 적응하고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지 연구·적용하는 것과 빠르게 변하는 환경을 복원하기 위해 환경 당국의 정책 등을 감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천수주말농장에는 바나나를 제외하고도 열매마(하늘마), 무화과, 차요테 등 3종의 아열대성 식물이 자라고 있다. 이 중 ‘하트 모양’ 잎을 가진 열매마는 줄이나 지지대를 타고 올라 벽면을 가득 채우는 덩굴식물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그린커튼’이라고 불리는 열매마는 이미 상업화에도 성공해 도심 속 건물 벽면에서 탄소 저감, 건물 기온 조절 등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도 열대·아열대성 작물이 잘 자라는 생육 환경을 가지게 된 것은 기후변화 때문이다. 실제 기상청의 ‘2023년 기온연감’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연평균 기온은 13.7도로 1973년 이래 역대 가장 높았다. 연 강수량 역시 1746㎜로 평년 대비 131.8%를 기록하면서 역대 세 번째로 많았다. 지난달에도 전국 평균기온이 22.7도를 기록해 기상 관측 이래 6월 중 가장 무더웠다.
현재 수준과 유사하게 온실가스를 배출할 경우 미래 기온을 예측한 고탄소 배출 시나리오(SSP5-8.5)는 우리나라 평균 기온이 2030년 13.3도에서 매년 상승해 2100년에는 19.5도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지속되는 기온 상승은 과수 재배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미 사과 등을 비롯한 과수 재배 한계선이 지속적으로 북상 중이고 단감·감귤 등 한반도 남부 지방 일부에서 자라는 과일의 재배지는 점점 확대하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자라지 않았던 올리브나무 같은 품종은 이미 제주 지역 노지에서 재배되고 있다.
2022년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은 “사과는 과거 30년의 기후 조건과 비교하면 앞으로 지속해서 재배 적지와 재배 가능지가 급격하게 줄고 2070년대에는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만 재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과와 더불어 복숭아와 포도도 각각 2030년대와 2050년대까지 총 재배 가능지 면적을 유지하다가 이후 급격히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과수의 생육은 ‘월동’ 가능 여부가 중요한 탓에 여름철에 열대 과일이 맺혔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당장 열대 과일 재배 가능지가 됐다고 판단하기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우리 여름 날씨는 30도 이상의 기온이 지속되는 더위와 장마 등에 따른 높은 습도를 보인다. 이에 겨울을 나는 동안 나무가 온실 속에서 자라다가 여름철 노지로 나올 경우 꽃이 피고 과수가 맺히는 환경이 어느 정도 갖춰져야 하기 때문이다.
전지혜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온난화대응농업연구소장은 “바나나 등 열대 과일이 우리나라에서 재배가 안 됐던 것은 겨울철 한계 온도 때문”이라며 “겨울이 오면 열대성 작물은 죽는데 온실에서 겨울을 보내고 노지에 나온 나무들이라면 우리 여름 날씨에서도 자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겨울이 짧아지고 평균기온이 올라가고 있는 상황은 우리나라에서 아열대 과일을 재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생육 한계 기온의 상승으로 작물의 월동 가능성이 올라갈 뿐 아니라 온실의 온도 유지를 위해 투입되는 난방비가 감소하는 등 재배 조건이 완화되기 때문이다.
기온연감을 바탕으로 지난 50년을 10년 단위로 묶어 분석한 결과 1973~1982년 겨울철 평균 기온이 영하권이던 해는 총 7개년이었다. 반면 2013~2022년에는 단 한 해만 겨울철 평균기온이 영하를 기록했다. 전 소장은 “기후변화로 과일이 극단적으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현재 품종과 재배 시스템으로 재배지 변화는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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