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치매를 진단받은 크리스토퍼(에길 올라프손)는 죽기 전 마지막이 될지 모를 모험을 감행한다. 50년 전 런던의 어느 아침 잠긴 문 앞에서 마주했던 사라진 시간, 그를 괴롭혔던 물음 “왜 그들은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났을까”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이다.
아이슬란드 감독 발타자르 코루마쿠르의 ‘터치’(2024)는 첫사랑을 잃어버린 인생 황혼기의 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다.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의 참혹한 결과로 사랑과 삶을 함께 잃은 한 연인에 초점을 맞추며 분쟁의 트라우마가 다음 세대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원작은 2020년 아이슬란드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올라프 요한 올라프손의 소설 ‘닿다’(Snerting)이다.
발타자르 코루마쿠르 감독은 “소설은 내가 찾던 러브스토리였다. 스릴 넘치고 강렬하며 관능적인 독특한 첫사랑이자 인종을 넘나들고 시공간을 거슬러 올라가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건 중 하나를 엮어내면서 팬데믹의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현재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세대 간 트라우마를 손가락질하거나 양극화된 관점 없이 부드럽게 풀어낸 방식에 감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의 비극적 유산, 그리고 우리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할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를 일깨워주었다”며 “특히 나이든 크리스토퍼를 연기한 에길 올라프손은 최근 파킨슨병 진단을 받아 신체적·정신적 상태를 고려해야 했는데 결국 그 여정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고 했다.
발타자르 코루마쿠르 감독은 에베레스트 조난 사고를 모티브로 한 산악 영화 ‘에베레스트’(2015),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어드리프트: 우리가 함께한 바다’(2018), 남아프리카로 여행 간 가족이 겪는 생존 사투를 그린 ‘비스트’(2022) 등 믿을 수 없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서바이벌 스릴러 장르 제작자로 잘 알려져 있다.
영화 ‘터치’ 개봉에 앞서 지난 7일 진행된 버추얼 기자회견에서 로맨스 영화 연출에 관해 묻자 코루마쿠르 감독은 “냉전의 그늘에서 자란 탓에 원자폭탄은 끊임없는 위협이었다.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가 원자폭탄의 위험성과 파급력을 우리만큼 잘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서두를 뗐다. 이어 그는 “미국 관객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원래 셰익스피어, 입센, 체홉의 작품에 출연하고 연출을 맡으며 배우와 무대감독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존 포드의 비극 ‘그녀는 창녀’를 연출하기도 했다. 아이슬란드 초기 필모그래피를 보면 블랙 코미디, 드라마틱 스릴러, 캐릭터 중심의 드라마, 주로 가족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 많다”고 답했다.
인생 후반에 잃어버린 연인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이들의 이야기를 실제로 많이 들었다는 그는 “크리스토퍼 역을 맡은 에길 올라프손도 어머니가 첫사랑을 찾기 위해 아버지와 이혼한 후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을 그와 보냈다고 한다. 그 사실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더욱 현실감 있게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급진적인 정치 성향으로 인해 학업을 뒤로하고 일식당에 취업한 크리스토퍼는 1969년 여름, 그곳에서 미코를 만난다. 한동안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만 곧바로 그녀에게 빠져들게 된다. 지적이고 관찰력이 뛰어난 크리스토퍼는 일본어와 일본 문화에 푹 빠지게 되고 결국 미코의 사랑을 얻지만 두 사람의 연애는 오래가지 못한다. 미코가 그에게 히로시마에서 겪은 가족의 끔찍한 경험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코와 그녀의 아버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사랑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고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라고 해도 50년 만에 밝혀지는 진실은 가슴을 후벼판다. 미코의 아버지인 다카하시는 1945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9초 만에 10만 명이 사망했을 때 가까스로 죽음을 피했다. 같은 해에 미코가 태어났고 어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방사능 피폭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결국 ‘생존’에 천착해온 발타자르 코루마쿠르 감독은 사랑의 본질에 대한 아름다운 메시지에도 히로시마 원폭의 투하가 인류에게 남긴 상처를 담는다.
영화 ‘터치’에는 기무라 타쿠야와 쿠도 시즈카의 둘째 딸 코키가 크리스토퍼의 첫사랑 미코로 출연하고 나이든 미코는 캐스팅 디렉터 나라하시 요코가 연기한다. 런던 정경대를 휴학하고 일식당 ‘니폰’에서 설거지 일을 하는 젊은 크리스토퍼는 발타자르 코루마쿠르 감독의 아들 팔미가 연기하는데 아버지의 후광이 필요없어 보인다.
/하은선 기자·골든글로브협회(GGA) 정회원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