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의 직무 정지를 감수하고서라도 야당의 탄핵소추안을 정면 돌파하기로 한 배경에는 거대 야당의 탄핵 횡포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비장함이 깔려 있다. ‘오물 탄핵’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윤석열 정부 들어 반복되고 있는 방통위 수장에 대한 ‘무한 탄핵 굴레’를 끊을 때가 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야당의 이 위원장에 대한 탄핵이 임명된 지 사흘, 업무를 본 지 하루 만에 진행된 만큼 헌법재판소의 결정에서도 승산이 높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서 방통위는 최소 석 달 이상 마비되는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정혜전 대통령실 대변인은 2일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 주도로 이 위원장에 대한 탄핵안이 통과되자 “방통위원장이 근무한 단 하루 동안 도대체 어떻게 중대한 헌법 또는 법률 위반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고 지적했다. 이 위원장도 입장문을 내고 “거대 야당의 탄핵소추라는 횡포에 당당히 맞서고자 한다”면서 “탄핵소추의 부당함은 탄핵심판 과정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실제로 대통령실은 헌재에서 이 위원장 탄핵안이 각하 또는 기각될 것으로 예상하는 분위기가 짙다. 야당은 방통위가 ‘2인 체제’로 공영방송 이사 선임 안건을 의결한 것 자체가 위법이라고 주장하지만 대통령실은 법률적 요건을 갖춘 정당한 업무일 뿐 탄핵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앞서 탄핵안이 제출된 이동관·김홍일 전 위원장과 이상인 전 부위원장(직무대행)의 경우 국회 표결 직전 자진사퇴를 택했다.
야당 주도의 ‘탄핵의 늪’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에도 힘이 실렸다는 분석이다. 헌재가 이 위원장의 손을 들어준다면 정치적 역풍이 야당을 향하면서 탄핵안 발의에도 제동이 걸릴 것이라는 기대감도 감지된다. 민주당 등 야권은 윤석열 정부에서만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검사 3인(안동완·손준성·이정섭)에 대한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 가운데 이 장관과 안동완 검사 탄핵안은 헌재에서 기각돼 무리한 탄핵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 위원장이 자진 사퇴를 해버리면 ‘후임자 발탁→국회 청문회→탄핵소추’ 사이클이 계속 반복될 것”이라며 “헌재 판단에 따라 야당은 정치적 심판뿐 아니라 법률적 책임도 져야 한다”고 경고했다.
다만 방송 뿐 아니라 정보통신기술(ICT) 정책의 주무 부처인 방통위가 수개월째 제 기능을 못하는 것은 부담이다. 이 위원장의 직무 정지로 전체회의를 개최하지 못하게 되면서 쌓여있는 안건들의 의결도 불가능해졌기 때문. 방통위가 올 해 업무계획으로 추진 중인 핵심 과제 중 애플리케이션 마켓 제재, 미디어와 인공지능(AI) 관련 법 제정, 단말기유통법 폐지 등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이 위원장이 취임사에서 밝힌 ‘통합 미디어법’ 제정 계획도 불투명해졌다.
야권은 이 위원장 탄핵안 통과와는 별도로 윤석열 정부와 방통위를 향한 압박을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는 이날 야당 주도로 열린 전체회의에서 9일 ‘불법적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선임 등 방송장악 관련 청문회’를 열기로 했다. 야권은 이 위원장을 비롯해 김태규 부위원장과 권태선 방문진 이사장, 서기석·권순범·정재권 KBS 이사 등 28명을 증인으로 채택됐다. 6일에는 공영방송 이사 선임 과정의 적절성을 확인하기 위한 방통위 현장 검증도 실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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