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피부색이 어두워서일까.’ (오텔로)
25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암전과 함께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라는 타이틀이 사라지고 조명 두 줄기가 중앙의 오케스트라 박스를 비추자 백발의 거장이 양 어깨를 절도있게 휘둘렀다. 세계적인 오페라 오케스트라 지휘자 카를로 리치의 지휘 아래 트럼펫을 비롯한 금관 악기의 육중한 소리가 정적을 가르자 막이 올랐다. 백여명의 배우들이 좁은 무대를 가득 채운 채 노래를 시작했다. 순식간에 관객들은 700년 가까운 시간을 뛰어 넘어 15세기 말의 어느 폭풍우 휘몰아치던 밤 키프로스섬으로 이동했다.
많은 이들이 간절히 배가 무사히 닻을 내리기를 바라는 가운데 한 사람만이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 부하이자 기수인 ‘이아고(바리톤 프랑크 바살로)’다. 위풍당당하게 나타난 주인공 ‘오텔로(테너 이용훈)’는 사랑하는 순백의 여인 ‘데스데모나(소프라노 흐라추히 바센츠)’와 감격의 해후를 한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그렇듯 그는 사랑도 업적도 모두 쟁취한 최정점의 순간에 파멸을 맞이할 운명이다.
계략을 꾸며내 함정을 만든 것은 이아고지만 그 함정을 ‘벗어날 수 없는 늪’으로 만든 것은 오텔로 내면의 열등 의식이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개선 장군이지만 무어인이라는 정체성은 그를 좀 먹는다. 연출을 맡은 키스 위너는 “오텔로와 이아고 두 남자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가장 길고 어두운 지옥을 발견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다”고 평했다. 자신의 근원은 악이라고 자랑스럽게 방백을 하며 오텔로의 열등 의식을 이용하는 아이고와 자신이 쌓은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알면서도 파멸의 속도를 늦출 수 없는 오텔로의 ‘폭주 대결’에 가깝다. 이용훈 테너는 오텔로를 두고 “밀라노 라스칼라 극장에 주역으로 데뷔했는데도 첫 2주간은 리허설에도 참여하지 못했다”며 유럽 오페라 극장 데뷔 시절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 대결 속 단연 압도적인 것은 이용훈 테너의 성량과 연기력이다. 4층 객석까지 뚫고 올라온다는 후기가 잇따를 정도로 그의 성량은 관객들을 공평하게 찾았다.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인 ‘데스데모나’ 다섯 글자를 부르는 발성에도 수만 가지의 감정 변화가 담겼다. 사랑의 감정을 나눌 때는 한 떨기 꽃처럼 조심스레 그 이름을 부르는가 하면 어느 순간은 두통을 자극하는 머릿속 전기 자극처럼, 또 어느 순간에는 이름을 말하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킬 태세다.
배우들의 연기력이 돋보여 연극적 재미도 가득했다. 강렬하게 사용되는 미쟝센(의도를 전달하는 시각적 장치)인 ‘가면’과 ‘손수건’을 통해 주인공의 파멸의 운명을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데스데모나에 대한 의심으로 오텔로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2막 후반부에서는 그를 비추는 거울 속에 나타난 남자가 검은 가면을 쓴 채 바로 암전된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심장이 ‘쿵’하고 내려 앉는 순간이었다. 절대적으로 순수한 마음을 보여준 데스데모나를 제외한다면 절규하며 몸을 뒤집고 포효하는 오텔로를 쉽사리 비난할 수 없다. 오텔로는 결국 무너졌지만 이용훈표 오텔로는 새 역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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