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외교관들이 밖에 나가서 가장 먼저 하는 게 배지부터 떼서 주머니에 넣습니다.”
지난해 11월 탈북한 리일규 전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참사가 26일 국민의힘 의원들이 만든 연구 단체 ‘북한 그리고 통일’에서 첫 공식 대외 행보를 가졌다. 그는 이날 외교관 활동을 하며 느꼈던 자괴감을 토로했다. 북한 주민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가슴에 김일성·김정일 초상화 등이 들어간 배지를 착용해야 한다.
리 전 참사는 이날 ‘3대 세습과 고립 외교’라는 주제로 강연하며 “북한 고립의 가장 큰 이유는 ‘3대 세습’”이라고 비판했다. 쿠바에서 두 차례 근무한 북한 외무성의 대표적 ‘남미통’이자 '김정은 표창장’까지 받았던 그는 “북한 체제에 대한 염증과 미래가 없다는 암담함에 탈북을 결심했다”고 했다.
그는 “북한의 대외 관계가 가장 전성기를 맞았을 때는 김일성 시대”라며 “자주·평화에 기초해 세계 모든 나라들과 친선 협조 관계를 발전시켰다”고 평했다. "김일성은 알제리, 인도네시아 등 비동맹운동 회원국들 순회방문하고 그 나라 국가수반들을 평양에 초청해 비동맹운동 정상회의 등을 주도했다"고 설명했다.
리 전 참사는 “김정일 집권으로 대외 관계가 위축되기 시작했다"며 "북한을 우호적으로 대하는 나라들과의 관계만 신경썼다”고 짚었다. 그는 "국가 외교의 목표는 '체제 수호'로 전환됐고, 외무성의 주요 업무는 미국의 군사적 공격을 저지하고 협상을 통한 시간 벌기였다"고 말했다.
그는 “김정은 집권 시기는 국제적 고립이 가장 심각하던 시기로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외정책 이념은 사회주의 집권당들과의 관계를 우선 발전시키면서 미국 패권주의에 반기를 드는 나라들과 연대를 강화하는 것으로 완전히 바뀌었다”며 “중국, 러시아, 베트남, 쿠바, 이란, 시리아 등 다 합쳐도 11개 정도의 나라들하고만 관계를 발전시키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김정은 시대 대외 관계 원칙을 ‘고압 외교’라고 표현했다. 그는 “북한이 6차례 핵실험을 했는데 그 중 4번을 김정은이 했다”며 “김정은은 핵·미사일에 집착하면서 어떠한 협상이나 국제 공조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을 로켓맨이라 할 정도로 핵에 집착하지 않았냐”고도 했다.
특히 리 전 참사는 “가장 가슴 아프게 ‘외교 고립’을 느낀 것은 주재국 주민들의 시각”이라며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묻는 것을 외교관들이 가장 싫어했다. ‘사우스(South·남)’냐 ‘노스(North·북)’냐. ‘노스’라고 말하는 게 얼마나 치욕스러운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내 국가가 창피스러운데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리 전 참사는 “다른 건 몰라도 최소 대북 문제만큼은 정권에 따라 흔들리는 게 아닌 일관성 있는 원칙을 국회의원들이 만들어주셨으면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북한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도 이날 참석해 “예전에 리 전 참사를 탁구로 이겨보려고 매일 점심시간에 게임을 했는데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고 회상하며 “2016년 탈북 후 고위급 외교관 탈북이 이어지고 있는데, 변화하는 북한의 실상이 어떨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북한 그리고 통일’은 윤석열 정부 초대 통일부 장관을 지낸 5선 권영세 의원이 대표의원을, 윤 정부 초대 통일부차관을 역임한 김기웅 의원이 연구책임의원을 맡고 있다. 권영세 의원은 포럼 축사에서 “통일은 단순한 구호와 탁상공론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며 "실질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을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김기웅 의원도 "국제 정세나 북한의 태도가 아주 어렵지만, 이럴 때 우리가 통일 의지나 통일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이 내게 주어진 소중한 마지막 임무인 것 같다"며 "통일에 대한 우리 5000만 국민, (북한의) 2700만 명의 뜻을 하나로 모으고 언젠가는 반드시 이룰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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