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이 2026년도 의과대학 입학 정원 조정 문제에 대해 ‘원점 재논의’라는 입장을 밝힌 것은 의료 공백의 장기화로 급격히 악화하는 민심을 달래려는 차원으로 풀이된다. 특히 교착 상태에 빠진 의정 갈등의 해법을 두고 여권 내에서 의견이 갈리고 있는 점도 정부에 부담 요소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당정이 모처럼 합심하며 의정 간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집단 이탈한 전공의 등 의료계가 여야의정 협의체에 적극 참여할지는 미지수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은 6일 방송 인터뷰에서 “여야의정 협의체에서 의료계 대표가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하면 충분히 논의가 가능하다”며 “저희가 제안한 2000명이라는 숫자에 구애되지 않고 합리적 방안을 가져오면 논의한다는 방침”이라고 말했다.
‘합리적 방안’이라는 단서를 달았으나 대통령실이 2000명 증원 방침을 고수하지 않고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는 의지를 직접 내보인 것이다. 장 수석은 협의체에 참여할 의료계의 성격을 두고 “대통령실이 지목하기는 어려운 문제”라면서도 “문제의 당사자인 전공의와 의대생을 대변할 단체가 들어오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다만 여당 일각에서 제기된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과 박민수 복지부 2차관 경질 요구에 대해 대통령실은 ‘수용 불가’ 입장에 변함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완강한 태도를 지켜온 대통령실이 내후년 증원 유예를 포함해 모든 가능성을 협의할 수 있다고 시사한 것은 의정 갈등에 대한 비난 여론이 갈수록 확산하고 있어서다. 정부는 당초 의대 증원 계획에 대한 압도적 찬성 여론을 등에 업고 의료 개혁에 드라이브를 걸고 나섰지만 응급실 등 필수의료 공백 우려가 커지면서 개혁의 동력이 떨어지는 분위기다. 실제로 한국갤럽이 이달 3~5일 전국 성인 100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2주 연속 23%였고 부정 평가 이유 1위로 ‘의대 정원 확대(17%)’가 꼽혔다.
특히 콘크리트 지지층마저 이탈할 조짐이 심상치 않다. 그간 윤 대통령의 지지율이 부침을 거듭할 때도 ‘70대 이상’에서는 압도적 찬성을 보였으나 이번 조사에서는 부정(47%)이 긍정(45%)을 넘어섰다.
의정 간 깊어진 갈등 관계가 돌파구를 찾지 못하자 여당이 ‘출구전략’을 띄우며 중재에 나섰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이날 여야 정당과 의료계·정부가 함께 참여하는 ‘4자 협의체’를 제안했고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2026학년도 의대 증원 등에 대해 ‘원점 재검토’ 입장을 밝혔다. 한 대표는 대통령실과 협의체 구성을 조율했는지 묻자 “대통령실에서도 공감하는 사안”이라고 답했다. 의료 개혁을 두고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였던 당정이 일치된 대응에 나선 것이다.
야당 역시 협의체 구성에 일단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노종면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은 “4일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가 제안한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에 국민의힘이 동의한 점은 늦었지만 다행”이라며 “국민의힘은 이제라도 용산 눈치 보지 말고 의료 붕괴를 막을 실질적인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우원식 국회의장도 입장문에서 “개원사에서 제안한 여야의정 사회적 대화의 성사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정부가 문제 해결에 전향적인 자세로 전환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꽉 막힌 ‘의정 갈등’을 풀어낼 첫 단추가 끼워졌지만 의료계가 대화의 장에 나설지가 관건이다. 당정이 태도 변화를 보인 점은 긍정적으로 보지만 4자 협의체 참여에 실익이 있을지 의구심을 보이고 있어서다. 최안나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이제라도 정치권 인식이 변하는 건 다행이지만 전공의와 의대생의 의견이 중요하다”고 협의체 참여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이주열 남서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내년도 의대 증원 유예라는 정치적 결단만이 의료 대란을 수습하고 비정상적 의대 교육을 막을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공식 대화 테이블이 만들어질 수 있게 우선 의료계에 명분을 줘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특히 의료계가 ‘기피 인물’로 지목한 박민수 차관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민의힘 소장파, 원외 당협위원장 모임인 ‘첫목회’가 전날 개최한 의정 갈등 토론회에서도 박 차관 경질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은 “의사 단체가 박 차관이랑 마주 앉지 않겠다는 의사가 강하다”며 “의정 갈등 해소의 첫 번째는 인사 조치”라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