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대만 사회에서 남성 성소수자라는 사실로 속을 끙끙 앓던 한 청년은 영화와 소설에서 안식처를 찾는다. 하지만 소설을 쓰면 굶는다는 핀잔이 따라다녔다. 기자가 되어 독일 베를린에 가서야 처음으로 ‘온전히 혼자 있는 자유’를 느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자랐던 곳의 억압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대만계 소설가 천쓰홍의 이야기다. 국민당 정권 치하 계엄령이 내려졌던 백색 테러 시기(1949~1987) 대만의 시대상을 담아낸 전작 ‘귀신들의 땅’은 우리나라에서 1만5000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주목을 받았다.
천쓰홍은 9일 진행된 신간 ‘67번째 천산갑’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전작과 이번 작품은 모두 자유에 관한 책”이라며 “캐릭터들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유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배우와 작가로서 활동하는 그는 40대가 되어서야 ‘귀신들의 땅’ 소설 집필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서른셋에 쓰기 시작했지만 그때는 쓰다가 중단한 적이 많았어요. 하지만 ‘이제 슬픔도, 뱃살도 충분히 쌓였구나’하고 때가 됐다고 느꼈죠.”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내면서 해방감도 느꼈지만 아직도 그에게는 가족이나 동네 사람 등 가까운 독자들의 존재를 의식할 때마다 불편한 감정이 든다. 대만은 2019년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지만 그렇다고 사회 전반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뀐 것은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십여년 전인 서른 살 당시 성정체성을 공개한 뒤 공개 성소수자 작가인 그는 살해 협박 메일도 받았다. 그는 “대만 같은 경우는 신체적 거리는 가깝지만 심리적 거리는 멀다”며 “한국도 비슷하겠지만 혼밥을 하는 선택조차 쉽지 않은 곳”이라고 강조했다.
서로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진 이성이 유독 남다른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관계를 중화권에서는 ‘게이미(gay蜜)’로 지칭한다. 어린 시절 한 광고 촬영 현장에서 만나 꿈 같은 단 잠을 잔 소설 속 두 주인공은 연락이 끊긴 인생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서로 특별한 관계로 남는다. 이들은 어린 시절 함께 가려다 가지 못한 프랑스 낭트로 가는 여정에 동행하지만 결국 낭트에는 다다르지 못한다. 이 ‘다다르지 못함’은 천쓰홍에게는 중요한 지점이다. “내가 어딘가를 가고 싶어하지만 그럴 수록 유독 가지 못하는 곳이 있어요. 그게 인생인 것 같아요. 그때 남는 아쉬움의 소중함에 대해서도 전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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