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9일(현지 시간) 유럽연합(EU)의 글로벌 경쟁력이 ‘실존적 위기’에 직면했다며 연간 8000억 유로(약 1187조 원) 규모의 신규 투자를 촉구했다. EU가 미국과 중국에 뒤처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새로운 산업 전략’과 규제 혁파 등 신속한 개혁이 시급하다는 주장이다.
드라기 전 총재는 이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이 같은 내용을 담은 400쪽 분량의 ‘EU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를 공식 발표했다.
보고서는 대규모 신규 투자와 기술 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이 없으면 유럽이 미국·중국에 더욱 낙오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유럽은 지난 20년 동안 미국보다 느리게 성장했는데 지금과 같은 저성장 추세가 이어지면 생활 수준까지 떨어질 위험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드라기 전 총재는 “이는 실존적 도전”이라며 문제 해결을 위해 연간 7500억~8000억 유로의 추가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U 국내총생산(GDP)의 4.4~4.7%에 해당하는 막대한 규모다.
자금 조달을 위한 방안으로 EU 자본시장 통합을 제안했다. 드라기 전 총재는 “유럽이 방대한 단일 시장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경제적 어려움의 원인”이라고 지적하면서 유럽이 각국 거래소 등을 결합해 수조 유로의 유동성 자금 풀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공동 부채’를 적극 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로존 국가들이 연대보증해 유로본드를 발행하는 방식이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그는 또 국방·통신·에너지 인프라 등 공공재 분야의 공동 프로젝트와 공동 조달이 해법이 될 것으로 봤다. 드라기 전 총재는 “공공의 지원 없이 민간만으로는 투자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며 “유럽 주요 공공재의 획기적 혁신에 투자하는 공동 자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드라기 전 총재는 유럽 기업들의 성장과 확장을 옥죄는 과도한 경쟁 규칙을 완화할 것도 제안했다. 독과점 가능성이 있는 기업 합병 건에 대해서도 사전 규제보다는 승인 후 사후 검토를 하자는 게 핵심이다. 그는 “과도한 경쟁 규제가 중국·미국의 슈퍼스타 기업들과 경쟁하기 위해 충분한 규모를 갖춰야 하는 유럽 기업들을 가로막고 있다”며 “경쟁은 건전성보다는 미래 지향적이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보고서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지난해 9월 EU의 경쟁력 강화 방안을 연구해달라고 공식 의뢰한 데 따른 것으로 11월 출범하는 ‘폰데어라이엔 2기’ 정책 수립에 반영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다만 EU 27개 회원국의 만장일치 합의가 필요한 데다 공동 채권 발행 등은 회원국 간 입장 차가 크다는 점에서 실현 가능성에는 의문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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