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다양한 분야의 어린 영재를 발굴하는 한 TV 예능프로그램에서 13세 천재 발레리노가 화제가 됐다. 소년의 이름은 전민철(20).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어린이 주역을 뽑는 과정을 그린 이 프로그램에서 소년은 “남자가 무슨 무용이냐”며 화를 내는 아버지를 설득하며 오디션에 나섰지만 결국 불합격했다.
그리고 7년 뒤 선화예중고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서 발레에 매진하던 소년은 얼마 전 두 가지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을 전했다. 세계 최정상의 ‘마린스키 발레단’ 입단과 유니버설 발레단의 블록버스터 발레 ‘라 바야데르’ 전막 주역 캐스팅 소식이다.
지난 12일 서울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만난 전민철은 “아직 학생 신분이기 때문에 이런 기회가 올 줄 몰랐지만 저를 학생이 아닌 무용수로 봐줬다는 사실에 감사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번에 전민철이 출연하는 ‘라 바야데르’는 클래식 발레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리우스 프티파가 1877년 제작한 작품으로 고대 인도를 배경으로 힌두 사원의 무희 니키야와 전사 솔로르, 솔로르의 약혼녀인 감자티 공주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다. 전민철은 이 중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니키야를 사랑하는 전사 솔로르 역을 맡았다. 솔로르 역은 니키야와 함께 고난도의 파드되(두 사람이 추는 춤)를 선보여야 하는 데다 삼각관계라는 복잡한 심경까지 연기해야 하는 만큼 스무 살의 전민철에겐 쉽지 않은 역할이다. 하지만 그는 “1막부터 3막까지 있는 대작 발레인데 관객들도 전민철이 어떻게 이끌어나갈지 궁금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아무리 춤을 잘 추고 동작을 잘 해내도 3막까지 이끌어나가지 못한다면 주역으로서 능력이 없는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번 공연에서 전민철이 주역을 맡기까지는 어린 시절부터 그의 재능을 지켜봐 온 문훈숙 유니버설 발레단장의 공이 컸다. 문 단장은 이번 공연을 결정한 직후 ‘솔로르는 전민철’이라고 발레단에 일찌감치 말해둔 것으로 전해진다. 아직 학생 신분인 전민철에게 솔로르 역을 맡기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그 무렵 전민철이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민철이 출연하는 29일 공연 티켓이 오픈과 함께 매진된 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마린스키 발레단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고전 발레단으로 모스크바 볼쇼이 발레단과 함께 세계 최고의 발레단으로 손꼽힌다. 전민철은 현재 수석 무용수로 활약하고 있는 김기민(32)에 이어 마린스키에 입단하는 두 번째 한국인이다. 전민철이 오랜 시간 꿈꿔 온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할 수 있게 된 데는 사실 김기민의 공이 크다. 전민철은 “마린스키가 김기민 선배 이후 더 이상 동양인을 뽑지 않는다는 소문을 듣고 꿈을 포기하려고 했다"며 "김기민 선배가 (유리 파테예프) 예술감독에게 영상을 보여주면서 오디션 자리가 마련됐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김기민 역시 오는 10월 ‘솔로르’로 무대에 선다. 국립발레단이 10월 30일부터 11월 30일까지 김기민을 앞세워 ‘라 바야데르’ 공연을 올리는 것. 연말을 앞두고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이 아닌 작품으로 두 발레단이 같은 작품을 공연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지만 전민철은 자신감이 넘친다. 그는 “춤은 인생의 경험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고 배웠기 때문에 선배들의 춤은 또 다른 매력이 나올 것”이라면서도 “저는 20대 전민철이 표현할 수 있는 색다른 솔로르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발레는 배운대로, 정석대로 하면 되는 ‘답이 있는 예술’”이라며 “스토리 구성과 동작, 연기를 지금 현재 제가 할 수 있는 기량으로 최대한 끌어올릴 것”이라고 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