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중국 베이징 차오양구에 자리한 일본대사관에는 폭우가 쏟아지는 궂은 날씨에도 경비원과 공안이 건물 안팎을 삼엄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선전에서 괴한이 휘두른 흉기에 찔린 일본 초등학생의 사망 사건 이후 일본대사관 주변은 여느 때보다 긴장감이 높아져 있었다. 베이징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일본인 A 씨는 “일본인들은 모두 이번 사건을 마음으로는 안타까워하고 있지만 혹시라도 추가 피해가 있을까봐 쉬쉬하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베이징에 자리한 일본인학교 주변에는 더욱 무거운 공기가 감지됐다. 등교시간을 지난 시간대였고 비가 세차게 내리는 터라 주변을 지나는 사람조차 뜸했다. 휴대폰으로 학교 외부 사진을 찍자마자 안에서 경비 인력이 나타나 촬영하지 말라는 손짓을 해 자리를 급히 떠야 했다.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 잔뜩 묻어났다. 일본 매체의 특파원 B 씨는 “일본인 부모들의 걱정이 커졌고 나 역시 어제부터 딸이 학교에 갈 때마다 동행했다”며 “이런 비극이 일어나면서 중국에 오고 싶어하는 부모(특히 엄마)가 크게 줄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웨이보 등에는 중국인들이 이번 사건에 대해 애도하는 글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한 네티즌은 “6월 쑤저우에 이어 또 어린 학생을 대상으로 흉악 범죄가 발생해 안타깝다”고 썼고 또 다른 네티즌은 “왜 중국 관영매체에서는 관련 보도가 없냐, 흉악범에 대한 비난도 없다”고 꼬집었다.
이번 사건으로 중국 내 일본인 교민 사회도 불안에 떨고 있다. 상당수 일본 기업들이 주재원 파견 제도를 축소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어 양국 관계가 얼어붙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날 NHK 등 일본 현지 언론에 따르면 피해자 부모가 근무 중인 파나소닉홀딩스(HD) 등 중국 주재 일본계 기업들은 직원 및 가족들의 일시 귀국을 허용하는 등 안전 대응에 나섰다. 기업들은 현지에 상담 창구를 설치하고 재택근무나 근무시간 변경 등 유연근무제를 도입했다. 선전시 인근 광저우시에 공장을 둔 혼다는 “가족 대동 직원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있다”며 “향후 대응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제조 공장들이 즐비한 광둥성은 자동차 등 일본계 대기업들이 대거 진출해 있다. 닛산자동차도 “주재원들의 개별 청취를 진행하고 있으며 아동이 다니는 학교의 안전관리 상황도 확인 중”이라고 전했다.
중국 주재원 파견 제도를 축소 또는 중단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한 일본 기업 관계자는 NHK에 “아이들을 겨냥한 폭력 사건이 이어지고 사망 사건까지 발생한 만큼 주재원 파견 제도와 가족 동반 문제를 재검토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예정됐던 일본인 참가 행사도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 광저우시에서는 일본인이 참가하는 시내 투어 등이 중지됐다. 베이징에서는 일본인회가 19일 밤 개최할 예정이었던 일본인 대학교수의 강연회가 중단됐다. 일본인이 거주하는 주택 단지에서 21일 열릴 계획이었던 부모와 자식 간 친목 행사 등도 급히 취소됐다.
중국에서 가장 많은 일본인(3만 7000명)이 거주하는 상하이에는 현지 총영사관과 일본인학교 관계자 등이 20일 긴급회의를 열고 향후 대응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날 가미카와 요코 외무상은 “중국에 있는 일본인학교나 학원 등을 대상으로 통학 시 안전을 재점검해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겠다”며 “아동이나 보호자들을 대상으로 정신건강 지원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으로 중일 관계가 경직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가운데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극히 비열한 범행으로, 중대하고 심각한 사안이고 현시점에서 예단을 갖고 말하는 것은 삼가겠지만 우선 중국 측에 사실관계 설명을 강력히 요구할 것”이라며 “일본인의 안전 확보와 재발 방지를 중국 측에 요구하면서 일본 정부로서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나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중국과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다. 양국 언론에 따르면 일본이 국제 감시 협정을 수립하고 중국이 독립적으로 시료를 채취 및 모니터링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양측이 동의했다. 이번 합의에 따라 중국은 일본산 수산물 수입을 재개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초등생 피습 사망 사건으로 양국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우려한 중국 정부가 전향적으로 수산물 수입 재개에 나섰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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