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전에 처음 이탈리아에 갔습니다. 이탈리아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은 참 아름답습니다. 베니스에 들르게 된다면 꼭 찾아주세요.”
지난 5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47분에 달하는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발레 음악 ‘로미오와 줄리엣’ 지휘를 마친 뒤 단원들을 소개하던 그가 이례적으로 말을 꺼냈다. 2007년 처음 라 페니체 오케스트라의 오페라 지휘를 수락한 뒤 17년 간 이어져 온 라 페니체 오케스트라와의 인연을 각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단원들과의 눈빛 교환 뿐만 아니라 이 같은 소개에서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라 페니체 오케스트라가 내한 공연을 펼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명훈은 지난 2022년 한국인 최초로 이탈리아 대통령이 수여하는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2등장)을 수훈했을 정도로 이탈리아에서는 특별한 지휘자로 꼽힌다. 지휘자 중에는 헤르베르테 폰 카라얀(1960년)이 이 훈장을 수훈한 바 있다.
많은 클래식 팬들에게는 정명훈 지휘자와 라 페니체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으로 앞서 전날인 4일 진행된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와 이날 마련된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프로그램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 어려운 고민거리를 안겨줬다. 정명훈 지휘자가 라 페니체와 2009년, 2010년 함께 했던 라트라피아타를 선택하는 것도 의미가 있었지만 정명훈의 발레 음악 연주를 보고 싶다는 게 더욱 끌렸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풋사랑의 감정을 심장이 두근대다 못해 간지럽기까지 한 감정으로 연주하던 플룻과 바이올린이 두 사람의 의지를 넘어선 주변 상황의 압박으로 비극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에서는 같은 악기가 맞나 할 정도로 격렬하고 절망적이었다. 특히 ‘티볼트의 죽음(모음곡 1번, Op.64)’부터 걷잡을 수 없이 질주하는 운명의 발길을 팀파니와 북의 환상적인 호흡으로 관객들의 마음까지 불안함 속에 내달리게 했다. 콘트라베이스 8대가 가장 낮은 곳에서 선율을 깔고 바이올린과 첼로도 강렬한 트레몰로를 통해 이들의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운명의 그늘을 더해줬다. 모든 곡에는 ‘정명훈만의 리듬’이 지배했다. 결코 짧지 않은 47분의 시간 동안 선율 만으로도 눈 앞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움직임이 그려지면서 모든 감정을 오가는 하나의 무성 영화를 보는 듯했다. 2007년 1월 세종문화회관에서 봤던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오리지널 프로덕션의 내한 공연의 감동도 되살아났다.
이날 2부의 강렬한 감동 전에 1부에서는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협연이 진행됐다. 정명훈 지휘자와 5년 만에 다시 만나 선보이는 호흡이었지만 늘 그랬던 듯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특유의 단아함과 정갈함이 돋보이면서 격이 있는 김선욱의 연주는 이 작품의 매력을 극대화했다. 모차르트의 전기 작가 장 빅토르 오카르는 이 작품을 두고 ‘모든 것이 여과되어 있는 우아함과 단순성, 동시에 감각적이고 명쾌한 즐거움이 배어 있다’고 평한 바 있다. 우아함과 단순성을 균형있게 배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연주자가 김선욱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정명훈 지휘자와 라 페니체 오케스트라는 두 차례의 앙코르 곡을 선보였다. 오페라 오케스트라인 만큼 강점이 있는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빌레리아 루스티카나’ 중 ‘간주곡(인터메조)’와 더불어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 피날레 부분을 선보였다. 장엄함과 함께 약동하는 기운이 이날 밤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을 이곳으로 옮겨온 듯 했다. 이 연주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관객들은 뜨거운 기립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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