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 ‘아노라’는 한마디로 ‘2024년판 귀여운 여인’이자 ‘잔혹한 블랙 로맨틱 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 1990년 영화 ‘귀여운 여인’에는 예의 바르고 로맨틱한 신사도 신데렐라가 되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우아한 ‘거리의 여인’(줄리아 로버츠)도 있지만 2024년 ‘아노라’에는 로맨틱한 데이트도 정중한 청혼과 우아한 ‘튕김’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과 연애를 대신한 건 쾌락이고 달콤하고 설레는 청혼은 1만 달러짜리 일주일 '여친 계약서'로 그리고 ‘계약 남친’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계약 여친’이 있을 뿐이다.
영화는 철부지 러시아 재벌 2세 이반이 미국으로 휴가를 와서 성매매 노동자 스트리퍼 아노라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러한 설정 때문에 미국 현지 언론에서는 ‘아노라’를 ‘브루클린에서 온 ’귀여운 여인'' 등으로 평가한다. 아노라에게 반한 이반은 1만 달러를 제시하면서 일주일 간 여자친구가 돼 달라고 거래를 시도한다. 액수 조율 등을 통해 이들은 연인이 된다. 연인 사이인 동안이 아노라는 이반이 요구하는 모든 쾌락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던 중 이반은 충동적으로 청혼을 한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진심이야?”를 두 번이나 묻는 아노라. 이때부터 그녀의 얼굴에서는 신데렐라의 꿈이 번져나간다. 마침내 스트리퍼의 생활을 청산하고 러시아 재벌2세의 부인이 돼 귀족처럼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으며 서툰 러시아어로 이반과 대화를 시도하며 아노라의 꿈은 더욱 커져만 간다. 그런데 우즈베키스탄 출신인 할머니를 둔 아노라가 어눌한 러시아로 이반에게 말을 걸 때마다 안타까움과 씁쓸함이 느껴질 때 즈음 이들의 관계에 파국의 서막이 올라간다.
아들이 성매매 노동자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무효화하려는 이반의 부모가 고용한 일명 ‘하수인 3인방'의 등장으로 아노라와 이반의 관계는 파국을 맞기 시작한다. 부모님이 무서운 이반은 하수인들과 아노라 몰래 사라지고 하수인들은 아노라를 추긍해 이반을 찾으려 안간힘을 쓴다. 이 과정에서 아노라는 그에게 닥친 현실을 부정하려 발버둥 친다. 바로 이 지점부터 영화는 철 없는 러시아 재벌2세가 벌여 놓은 로맨틱하지 않은 ‘로코’가 블랙 코미디로 갑작스럽게 장르가 변환된다.
우여곡절 끝에 아노라와 하수인들은 이반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아노라는 ‘또 다른 아노라’와 함께 있는 이반을 목격한다. “신데렐라는 없다”라고 이미 결론을 공개했기에 이러한 장면은 반전도 충격도 주지 못한다. 다만 그렇게 이반과의 결혼 관계 유지를 위해 발버둥치던 아노라가 이반의 엄마의 “너 집 있어? 차 있어? 그럼 모든 걸 빼앗길 거야"라며 위협하는 장면이 의뢰라면 의외였다. 이반의 엄마의 위협에 아노라는곧바로 수긍해 해버린다. 마친 어떤 것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의 빠른 포기처럼 말이다.
아노라의 이 같은 학습화된 무기력보다 더욱 더 씁쓸함과 충격을 안긴 장면은 마지막 신이다. 아노라를 집으로 데려다 주는 임무까지 맡은 ‘하수인 3인방’ 중 한 명인 이고르와 아노라가 차에서 벌이는 베드신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난제이자 수수께끼로 남는다. 어쩌면 이 난제는 영화 러닝 타임 내내 너무 많이 나와서 보기 불편할 정도였던 아노라와 이반의 성관계 장면과 같은 맥락일 수 있는 한편 이고르가 등장할 때부터 아노라를 바라보던 눈빛을 상기한다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영화의 절반 정도는 성관계 장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등장인물들도 돌려 말하지 않아 쉽게 파악이 된다.
그러나 감독이 설정해 곳곳에 배치한 메타포들은 스타 독립 감독에서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는 그에 대한 평가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쉬운 설명을 위해 1990년 작품 ‘귀여운 여인’과 비교하면, ‘귀여운 여인’의 남녀 주인공은 모두 미국인이지만 ‘아노라’에서는 남성은 러시아 재벌, 여성은 구소련에서 독립한 우즈베키스탄계 이민자. ‘귀여운 여인’에서의 남자 주인공은 성공한 사업가이자 젠틀맨 에드워드 루이스(리처드 기어), ‘아노라’의 남자 주인공은 어둠의 비즈니스로 부를 축적한 러시아 재벌의 2세로 철부지. 아노라와 이반의 결혼을 무효로 만들기 위해 이반의 부모가 고용한 ‘하수인 3인방'의 출신. ‘귀여운 여인’이 세계적인 흥행 성적을 냈던 1990년의 자본주의에서는 가능했던 일이 물론 당시에도 판타지였지만 그럼에도 대중이 꿈이라고 꿀 수 있던 일이 2024년의 자본주의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34년 동안 굳어진 경제 계급을 적나라하게 펼쳐 놓은 게 바로 션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후 베이컨 감독은 “이 상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성노동자를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차별당하는 트랜스젠더의 이야기를 다룬 ‘탠저린’,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계층 아이들의 비극을 그린 ‘플로리다 프로젝트’, 퇴물 포르노 배우를 통해 푸어 화이트 계층의 현실을 날카롭게 그려낸 '레드 로켓' 등 미국이 외면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를 카메라에 담아온 션 베이커에게 칸이 황금종려상이라는 대상을 안긴 이유를 곱씹게 된다.
한편 ‘아노라’와 베이커 감독이 내년 열리는 아카데미시상식에서 과연 수상을 할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안락사를 다룬 스페인 출신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룸 넥스트 도어’와 ‘아노라’의 맞대결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젊은 거장과 노련한 거장의 대결이라는 점, ‘룸 넥스트 도어’에서 ‘인생 연기’를 펼친 틸다 스윈튼과 ‘아노라’에서 성매매 노동자의 참혹한 현실이라는 어려운 연기를 발랄하게 소화해낸 미키 매디슨이 여우 주연상을 놓고 격돌한다. 매디슨이 여우주연사응 ㄹ
11월 6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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