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중의원 선거 참패로 이시바 시게루 내각은 몸집이 커진 야당을 견제하는 한편 당내 계파 싸움까지 상대하는 안팎의 어려움에 놓였다. 일본 정치가 당장 내부 구심점 찾기에 주력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한일 관계도 큰 진전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28일 전문가들은 이시바 총리의 리더십이 크게 손상된 만큼 한일 관계에도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정부는 일본이 역사 문제 등에 있어 ‘반 잔의 물컵’을 채우기를 바라는데 퇴진 압박마저 받는 이시바 총리가 자민당 내부 보수파의 반발을 무릅쓰며 한국에 양보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반잔의 물컵’론은 대일 외교에서 윤석열 정부가 먼저 물컵 절반을 채우면 일본 정부가 나머지 절반을 보탤 것으로 기대하는 입장을 뜻한다.
오히려 일본 정치인들이 지지율 하락 시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들었던 ‘우경화’ ‘역사 관련 강경 발언’ 같은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특히 이시바 총리가 옛 아베파를 중심으로 한 강경 보수 인사들의 눈치를 볼 가능성이 크다. 박영준 국방대 교수는 “당장 강성 우익으로 꼽히는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상이 견제를 시작할 것”이라며 “자민당 내 보수파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만큼 한일 관계에 새로운 모멘텀을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음 달 예정된 정상회의 일정도 꼬일 수 있다. 총리 지명을 위한 특별 국회 일정이 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민당은 다음 달 15~16일 페루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APEC)와 같은 달 18~19일 브라질에서 예정된 주요 20개국(G20)의 정상회의를 고려해 특별 국회를 다음 달 7일에 열려고 했다. 그러나 연립여당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 만큼 무소속 의원 영입과 야당과 일부 연계 과정에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특히 이시바 총리는 다음 달 5일 미국 대선 이후 당선인이 결정되면 취임식 전 미국을 방문해 ‘사전 관계 다지기’에 나선다는 계획도 세웠다. 이시바 총리는 “이들 일정에 적절하게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특별 국회 일정과 총리 지명 선거가 늦춰질 경우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이 여당과 연대하지 않겠다며 정권 탈환을 추진하는 것도 부담이다. 특히 노다 요시히코 입헌민주당 대표는 반한 인사로도 꼽힌다. 그는 총리 재임 당시 한일정상회담에서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고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 전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다만 한일 협력 추진의 방향이 바뀌지는 않을 거라는 시각도 있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입헌민주당 등 일본 야당도 한일 관계 개선과 한미일 안보협력에는 이시바 총리와 이견이 없다”고 분석했다. 입헌민주당 관계자 역시 “노다 대표를 친한이라 할 수는 없지만 지금은 반한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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