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임윤찬은 지난 6월 전국 순회공연에서 무소르그스키(Modest Petrovich Mussorgsky·1839~1881) ‘전람회의 그림’을 연주하여 관객들의 열광적 반응을 이끌어냈다. 유화를 보는 것만 같은 색채감 짙은 음악이었다. 그날 임윤찬은 원래 다른 곡을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고 ‘전람회의 그림’은 그가 공식적으로 연주한 적 없는 곡이었다. 그런데 불과 공연 40일 전에 스무 살 피아니스트는 연주곡을 과감히 변경했다.
그 이유에 대해 임윤찬은 며칠 동안 아무런 계기없이 ‘전람회의 그림’ 전곡이 계속 머릿속에 떠오르는 경험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그는 마치 운명처럼 무대 위에서 무소르그스키와 조우하게 된다.
이 작품은 임윤찬뿐만 아니라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1903~1989)의 피아노 편곡, 장 기유(Jean-Marc Guillou·1945~)의 오르간 편곡 등으로 개성 있게 변모하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대중음악 리메이크 등 크로스오버 시도도 다양하다. 원래는 피아노 곡이지만 다양한 오케스트라 편곡이 있고, 특히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1875~1937)의 관현악 편곡 버전은 더욱 입체감 있는 소리로 원곡의 매력을 극대화시켰다. 최근 명 지휘자 투간 소키예프(Tugan Sokhiev·1977~)가 이끄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전람회의 그림’ 라벨 편곡을 붓 터치 하나까지 세심하게 살려내는 듯한 연주로 대단한 찬사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전람회의 그림’은 적지않은 음악가의 상상력을 깨워 또다른 창작에의 도전을 불러일으키는 곡임이 분명하다.
무소르그스키는 이처럼 사람들의 잠재적 열정을 터치하는 음악을 어떻게 작곡할 수 있었을까.
음악사에서도 그는 독창적인 작곡가로 여겨진다. 음악 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했으며, 순탄치 못한 삶을 살다가 42세로 요절했다. 무소르그스키는 부유하게 자랐지만 러시아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가문의 몰락을 겪으며 안정되지 못한 생활을 했고 유일하게 피아노를 가르쳐준 어머니마저 잃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무너져 내린다. 이 무렵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에서 그를 지켜 준 두 명의 친구가 있으니, 건축가이자 화가인 빅토르 하르트만(Viktor Hartmann·1834~1873)과 예술평론가인 블라디미르 스타소프(Vladimir Stasov·1824~1906)다. 그들은 자주 만나 러시아 예술에 관하여 이야기하며 조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절친한 친구들이었다. 게다가 하르트만은 부모를 일찍 여읜 아픔이 있어 어머니를 잃은 무소르그스키에게 진정한 힘이 되어 주었고, 무소르그스키와 스타소프는 하르트르만의 예술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고 전해진다. 하르트만은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린 작곡가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불행히도 하르트만은 서른 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동맥류파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다. 감정적으로 연약했던 무소르그스키의 슬픔과 절망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떠난 친구와 남은 친구를 위해 스타소프는 하르트만을 추모하는 전시회를 기획하게 되고 그의 유화와 드로잉, 건축과 디자인 스케치 등 유작 400여 점을 모아 1874년 2월에 하르트만의 모교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아카데미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전람회의 그림’은 이 전시회에 출품된 열 점의 작품을 묘사하고 있는데 현재는 절반의 작품만이 확인되고 있다. 그 중 ‘사무엘 골든베르크와 쉬뮐레(Samuel Goldenberg and Schmuÿle)는 하르트만이 폴란드에서 그린 그림으로 화가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대비시켜 거만한 모습과 아첨하는 모습을 대위법적으로 묘사하여 그 성격적 차이를 극명한 선율로 드러내는 연극적이기도 한 곡이다.
하르트만이 프랑스에서 완성한 ‘파리의 카타콤(Catacombae)’은 자신의 모습을 담은 무겁고 어두운 곡이며, 청동 시계를 위한 디자인으로 그린 ‘닭발 위의 오두막(The hut on hen’s legs)’은 러시아 설화에 등장하는 마녀를 등장시켜 기묘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리고 가장 잘 알려진 마지막 곡 ‘키예프의 대문(The great gate of Kiev)’은 하르트만이 스스로 최고라 여겼던 작품이다. 이 디자인은 새로운 키예프성의 대문을 위한 러시아풍의 설계였는데 당시 건축계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화가의 모습이 곳곳에 투영된 꽤 그럴듯한 음악과 회화의 공동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이 곡들은 음악이기도 하고 그림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섯 곡의 ‘프롬나드(Promenade)’가 작품에서 작품으로 넘어가는 공간을 채운다. 프롬나드는 여백이 되기도 하고 사유가 되기도 한다. 무소르그스키는 전시장에서 작품들 그 사이의 미학을 알았던 것일까. 관람자의 동선과 공간적 시간까지 고려한 것을 기획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현대적이다. 이렇게 작곡된 ‘전람회의 그림’은 스타소프에게 헌정되었다. 세 친구 우정의 결실이다.
무소르그스키는 하르트만의 작품들을 통해서 분명 그를 다시 만났을 것이다. 극한 그리움은 예술적 영감이 되어 친구를 향한 진심을 담아낸 걸작을 남겼다. ‘전람회의 그림’이 시대를 넘어 여전히 생명력 있고 마음을 요동치게 하며, 또 다른 예술가들에게 넉넉한 영감을 되돌려 줄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떠나간 화가의 작품들은 매번 새롭게 연주된다. 음악이 된, 결코 끝나지 않을 불멸의 전람회에서.
▶▶필자 김보라는 성북구립미술관 관장이다. ICOM 한국위원회와 (재)내셔널트러스트의 이사이며, 서울시 박물관미술관 진흥정책 심의위원, 경기도 건축물 미술작품 심의위원이다.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큐레이터로 재직했고, 경기도미술관에 근무하며 건립 TF 및 학예연구사로 일했다. 국내외 전시기획과 공립미술관 행정에 대한 경험이 풍부하다. 2009년 자치구 최초로 개관한 성북구립미술관의 학예실장을 거쳐 2012년부터 지금까지 관장을 맡고 있다. 윤중식·서세옥·송영수 등 지역 원로작가의 소장품을 확보해 문화예술 자산에 대한 연구 기반을 확장했고 예술가의 가옥 보존과 연구를 기반으로 성북구립 최만린미술관을 개관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23년 ‘박물관 및 미술관 발전유공’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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