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발전은 새로운 지각의 지평을 열었고, 예술과 결합해 ‘미디어아트’를 탄생시켰다. 백남준이 꿈꿨던 세상처럼, 미디어아트의 등장은 창작 방식의 혁신 뿐만 아니라 전시와 감상 경험까지도 재편했다. 이러한 변화는 국경과 장르를 초월해 협력, 교류하는 국제 미디어아트 페스티벌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동유럽에서 가장 큰 국제 미디어아트 페스티벌로 자리 잡은 싸이페스트(CYFEST)의 등장 배경이다.
싸이페스트는 2007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됐다. 독립 큐레이터 그룹과 작가들에 의해 설립됐고, 교육자·엔지니어·프로그래머·미디어 활동가까지 협력해 전시는 물론 사운드아트, 비디오 및 교육 프로그램 등을 진행한다. 시각언어와 기술문화의 대화, 예술 전문가와 과학 공동체의 협력을 모색하는 글로벌 플랫폼이다. 보통 국제 미술제가 베니스비엔날레·카셀도쿠멘타와 같이 지역 기반인 것과 달리 여러 도시를 넘나들며 개최되는 ‘유목민적 문화행사’라는 특이점이 있다.
제16회 행사인 올해 ‘싸이페스트16(CYFEST16)’은 전 세계 65명의 작가가 참여해 11월 13일부터 12월 1일까지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의 7개 장소에서 열렸다. 감정과 기억이라는 친밀한 영역과 기술 발전 간의 관계를 연구했기에 ‘감정의 아카이브. 여정’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이번 싸이페스트16은 미디어아트계의 거장이며 올 초 작고한 필 닙락(Phil Niblock·1933~2024)에 대한 헌정으로 아르메니아 국립 필하모니아에서의 전위 오페라 프로젝트, 아르노 바바야니안 콘서트홀에서의 공연을 개최했다.
한국에서는 서울에서 활동하는 이승아 유아트랩서울의 디렉터가 VR 섹션과 비디오의 기술 언어를 탐구하는 프로젝트로 참여했다. 김기라, 김안나, 김정한, 스튜디오엠버스 703(Studio MBUS 703), 이예승 작가의 작품을 선보여 주목 받았다. 전시가 열린 헤이아트(Hay Art) 문화센터는 예레반 시(市) 정부가 협력·지원하는 컨템포러리 아트 특화 기관이다.
한국 작가들의 출품작은 급변하는 기술의 시대에, 과거로부터 공유된 집단적 경험과 사건이 개인적 기억과 감정,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탐구했다. 김안나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 OPIM( Invisible Cities:OPIM)’은 신체의 제약을 벗어나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예술적 실험을, 스튜디오 엠버스703(노치욱)의 ‘더 타입캡슐(The Time Capsule)’은 공통된 인간 욕망에 의해 주도되는 문화유산 기록을 보여준다. 김정한의 ‘버드맨의 여정(BirdMan’s Journey)’는 타인의 인식을 통한 자기 인식의 공생적 방향을 모색한다. 이예승의 ‘글래시 비전: 동동(A Glassy Vision: DongDong)’은 기술과 감각적 경험의 융합을 통해 미래를 재해석하고, 김기라의 ‘눈 멀고 말 못하는(Blind and Mute)’은 역사적 사건과 그에 따른 감정·기억을 탐구하며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성찰한다.
싸이페스트의 핵심 행사 중 하나인 비디오 부문에는 총 4명의 기획자가 초청됐다. 한국의 이승아 디렉터 외에 대만의 독립 큐레이터이자 시각 예술가인 무 튀안, 프랑스의 큐레이터 가브리엘 V. 수셰르, 러시아의 싸이랜드(CYLAND)미디어아트연구소 큐레이터 빅토리아 일류쉬키나가 참여해 다양한 최신의 작품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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