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유해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혐의로 기소된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 대표에게 금고형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파기했다. 다만 무죄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한 가습기살균제 제조사 옥시레빗벤키저 등과의 공동정범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만 인정한 것이다. 해당 가습기 살균제와 피해자들의 사망 또는 상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지 여부는 추가 심리가 필요하다.
대법원 1부(주심 서경환 대법관)는 26일 업무상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74)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65) 전 애경산업 대표에게 각각 금고 4년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이 이날 파기환송을 결정한 근거는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이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하는 과정에서 옥시 등의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자의 사망 또는 상해 결과에 대한 공동 인식이 없었다는 데 있다.
재판부는 "원심이 근거로 들고 있는 사정만으로 과실범의 공동정범 성립을 인정할 수는 없다"며 "과실범의 공동정범 성립을 인정한다면, 인터넷망 등을 통해서 국경을 초월한 상품의 구매·소비가 용이하게 이뤄지는 현대사회에서 상품 제조·판매자들 등에 대한 과실범의 공동정범 성립범위가 무한정 확장된다"고 짚었다.
형법 제 30조는 '2인 이상이 공동하여 죄를 범한 때' 과실범의 경우도 공동정범이 성립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주의 의무 위반 등에 대한 공동 인식이 없었다면 공동으로 죄를 범했다고 볼 수 없어 공동정범이 성립한다고 보지 않는다.
대법원은 피고인들과 옥시 등 관련사건 제품의 주 원료와 성분, 대사물질이 전혀 다르며, 이를 응용, 개발해 상품을 출시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결국 이 사건 제품과 원료가 다른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사망 또는 상해가 발생했다는 점만으로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다. 즉,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의 가습기살균제와 옥시 등이 제조 및 판매한 가습기살균제는 별개의 상품이므로 공동정범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어떤 제품이 개발·출시된 후 경쟁업체가 '기존 제품과 주요 요소가 전혀 다른 대체 상품'을 독자적으로 개발·출시한 경우에는 사망 또는 상해의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정을 공동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고 볼 여지가 없다"고 짚었다.
이날 파기환송 결정으로 2심 법원은 여러 제조사의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해 피해자들의 사망 원인을 규명해 업무상 과실치사 등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려야 한다.
대법원의 한 관계자는 "성분이 다른 가습기살균제 제조, 판매회사와의 공동정범은 성립하기 어렵다는 판결"이라며 "이 사건 가습기살균제만으로 복합사용 피해자들의 사망 또는 상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지 여부는 더 심리할 가능성이 있어 무죄 취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다만 업무상과실치사죄의 공소시효가 7년이기 때문에 이 사건은 면소 판결이 선고될 가능성도 크다. 앞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2010~2011년에 숨졌고, 검찰이 홍 전 대표와 안 전 대표를 기소한 시점은 2019년이다. 옥시 측과 공범이 아닌 것으로 판명나는 경우 일부 피해자에 대한 혐의는 공소시효가 만료된 것이기 때문에 범죄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형벌을 내릴 수 없다.
홍 전 대표와 안 전 대표는 각 회사에서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 등 독성 화학물질이 포함된 가습기 살균제 '가습기 메이트'를 제조·판매해 98명에게 폐 질환이나 천식 등을 앓게 하고 그중 12명을 사망케 한 혐의로 2019년 7월 기소됐다.
1심은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폐질환 또는 천식이 유발됐다거나 악화됐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2심은 유죄로 판결을 뒤집었다. 가습기살균제와 폐질환 간 인과관계를 인정하고 이들이 안전성을 검증할 주의의무를 위반했다고 판단해 각 금고형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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