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경제 자유화를 이끌어 오늘날 고속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만모한 싱 인도 전 총리가 26일(현지 시간)별세했다. 향년 92세.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싱 전 총리는 이날 자택에서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고 뉴델리에 있는 병원 응급실로 이송됐으나 숨을 거뒀다. 그는 최근 노인성 질환으로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1932년 인도 북부 펀자브주의 시크교 도시 암리차르에서 태어난 싱 전 총리는 인도가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최초의 비(非) 힌두교 총리로도 기록된다. 인도 내 시크교도는 인구의 2%에 불과하다. 그는 인도에서 대학을 다닌 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고 유엔무역개발회의에서 근무한 후 1969년 인도로 돌아왔다. 1971년 상무부의 경제 고문으로 취임한 후 인도 중앙은행 총재를 비롯해 여러 고위직을 역임하는 등 오랜 공직 생활을 했다.
그는 특히 재무장관을 역임했던 1991년 외환위기 당시 인도 경제를 자유화의 길로 이끌어 장기적인 고속 성장의 궤도에 올려놓은 인물로 평가 받는다. 엄격한 국가 통제로 고립됐던 인도 경제를 대외 무역 및 민간 투자 확대라는 개방 경제로 전환해 평균 연 2~3%에 불과했던 성장률을 9%까지 끌어올렸다. 실제 총리 재임 시절인 2004~2010년에는 전 세계 금융위기의 파고 속에서도 연평균 8%가 넘는 기록적인 경제 성장률을 달성했다.
2008년 공식 발효된 미국-인도 간 핵 협력 협정을 체결한 외교적 성과도 주목 받는다. 조지 부시 당시 미 행정부와 체결한 협정은 인도 핵 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허용하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핵기술과 연료를 제공 받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98년 인도 핵실험 이후 냉랭해졌던 미국-인도 관계가 ‘동맹’으로 격상한 계기가 됐다.
싱 전 총리는 온화하고 겸손한 태도와 청렴함으로 많은 인도인의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테크노크라트(기술·전문성을 기반으로 지배하는 사람)의 전형이자 시크교도 출신으로 정치·종교적 기반이 약했던 싱 전 총리의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4년 첫 임기에서 농민을 위한 부채 탕감 및 일자리 창출 계획 등을 수립하고 인도의 가속화된 성장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복지 프로그램 등을 마련했지만 2009년 시작된 두 번째 임기는 연립정부 파트너의 반대와 당내의 고립 등으로 여러 차례 좌절을 겪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그의 두 번째 임기는 당내 부패 스캔들과 불통하는 측근들, 높은 인플레이션 속에서 후퇴하는 경제로 인해 쓰라린 실망과 마비로 얼룩졌다”고 짚었다. 그 결과 2014년 총선에서 나렌드라 모디 현 총리의 인도국민당(BJP)에 참패했다. 싱 전 총리는 총리 재임 마지막 달인 2014년 “역사는 언론이나 야당보다 나에게 더 친절할 것”이라고 토로했다.
한편 이날 모디 총리는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고인을 기리며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 중 한 명”이라며 “재무장관 시절을 포함해 우리 경제 정책에 강력한 영향을 줬다”고 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