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포천의 한 낡은 창고. 더 이상 영업하지 않는 가구점의 간판이 매달려 있는 이 창고는 예술가들의 작업실로 다시 태어났다. 전기난로를 켜지 않으면 한겨울 추위를 막을 수 없는 열악해 보이는 이 공간에서 약 10팀의 예술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작업 활동을 한다. 예술가들은 흰색 테이프로 구획을 구분해 각자의 영역을 표시하고 조각·회화·미디어 등 각자 제도권 예술계가 ‘예술’이라 불러줄 만한 작품을 시도하고 다듬고 있다. 현재 서울 종로구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거꾸로 사는 돌’ 전시를 열고 있는 이끼바위쿠르르의 작업실도 이 창고의 2층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다.
세상에 없던 팀, 3인조 작가 밴드
“여기가 강북에서 강남 가는 것보다 가까워요.”
이달 13일 이곳 작업실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이끼바위쿠르르의 멤버 조지은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서울에 있던 작업실은 임대료가 너무 비싸 없애버렸다”며 “심리적으로는 멀지만 강남에서 차가 막혀 헤매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강북에서 이곳까지 오는 시간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근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거꾸로 사는 돌’은 생태에 뒤덮인 채 시간을 버텨내며 스스로를 지키고 있는 돌과 장소에 주목하는 전시다. 전시장에서는 이끼바위쿠르르가 전국 70여 곳의 장소에서 미륵 조각상을 찾아다니며 발견한 풍경을 산수화처럼 표현한 영상과 설치, 평면 작업 등을 만나볼 수 있다.
미술관 앞을 지나가는 이들은 이 같은 전시의 내용보다도 먼저 ‘이끼바위쿠르르가 뭐야’라고 말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가능성이 높다. 이끼바위쿠르르는 조지은·고결·김중원 세 명의 예술가로 구성된 시각 연구 밴드다. 통상 예술계에서 여러 명의 예술가들이 함께 한가지 목적의 작업을 할 때 이들을 ‘작가 집단’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끼바위쿠르르는 자신들을 스스로 ‘밴드’라고 부른다. 고결은 “사실 작가 집단이라는 단어가 어렵게 느껴졌고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공연에 가깝다고 생각해 2021년 팀을 결성하면서 밴드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제도권이 부여한 정체성 대신 스스로 정체성을 만들어낸 작가들인 셈이다.
‘이끼바위쿠르르’라는 이름도 독특하다. 아무도 쉽게 정착할 수 없는 곳에 가장 먼저 터를 잡고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존재가 바로 이끼다. 이끼바위쿠르르는 땅과 공기 사이의 좁은 경계에서 주변 환경에 따라 자신의 세계를 넓히는 이끼의 모습을 작업 태도에 반영한다. 그들은 농부·해녀·학자 등 여러 사람들과 만나며 그들의 삶의 방식을 통해 식물·자연현상·인류·생태학을 배운다.
‘닥치는 대로’ 만들며 이야기하는 ‘공동체’
그렇다면 이들은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할까. 기자의 질문에 조지은은 “닥치는 대로”라고 대답했다. 아무렇게나 내뱉은 대답 같지만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조지은은 이끼바위쿠르르를 결성하기 이전 ‘이주’를 주제로 하는 또 다른 팀에서 활동했다. 그러다 주제를 한정하지 않는 공동체 기반의 작품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새로운 그룹을 꾸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다 만난 이들이 고결·김중원이다. 두 사람은 모두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다. 조지은은 “학술적 경험이 꼭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다른 활동이나 일상이 자연스럽게 미술과 결합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두 사람과 함께하게 됐다”고 말했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두 사람도 이 같은 제안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고결은 “우리의 모든 작업에는 또 다른 동료들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과정이 포함된다”며 “모든 작품은 우리 셋 안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동료들에게 도움을 받고 함께 교류하면서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이끼바위쿠르르는 인터뷰 내내 ‘공동체’와 ‘동료’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함께 일군 작업의 가치를 강조했다.
이끼바위쿠르르는 이끼처럼 주변과 어우러지는 대상이라면 무엇이든 연구한다. 해체된 이주 노동자들의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땅탑(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23)’,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강제 동원된 광산의 풍경을 담은 ‘열대 이야기(카셀 도큐멘타 15)’, 해녀 공동체가 건재한 하도의 해녀합창단을 보여주는 ‘해녀 이야기(카셀 도큐멘타 15)’ 등은 소재는 제각각 다르지만 모두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이끼바위쿠르르의 대표작이다.
폐허에 남겨졌지만 살아남은 미륵
이끼바위쿠르르가 최근 1년간 공부한 대상은 ‘미륵’이다. 세 사람은 올 2월부터 전국 70여 곳의 장소를 돌아다니며 개발되지 않은 곳에 방치돼 남아 있는 미륵의 자료를 모았다. 작업은 마치 ‘수다’처럼 시작됐다. 고결은 “조지은이 단톡방에서 우연히 본 미륵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물꼬를 텄고, 각자 미륵에 대해 알아보면서 ‘채집’이 진행됐다”며 “모든 작업이 그렇게 일상에서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이들이 발견한 전국의 수많은 미륵은 대개 서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 어딘가에 버려져 있었다. 미륵은 동아시아 전통에서 미래를 상징하는 부처로 동학·불교·무교 등 다양한 종교의 영향을 받아 우리와 어우러져 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미륵은 사찰 주변에서 잊혀지거나 마을 어귀와 들판에 버려진 돌이 됐다. 조지은은 “잘 만든 미륵은 대부분 박물관에 있다”며 “우리가 찾아간 미륵은 관리가 거의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이 찾아가 만난 미륵은 현실 속에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채 풍경 속에 녹아들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조지은은 “폐허가 된 곳에 미륵이 주로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런 장소를 폐허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곳은 야생이었다”고 설명했다. 사람이 찾지 않는 폐허에 새로운 생태계가 조성된 것이다. 그는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폐허기 때문에 야생이 만들어졌고, 미륵이 생명력 있게 보존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작품은 관람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질까. 조지은은 “작업을 시작할 무렵 환경이나 여러 가지 상황이 안 좋았다. 모든 게 다 돈으로만 환산되고 그 돈으로 환산되는 것을 취득하지 못한 나를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최근 주말에 (탄핵) 집회도 나가야 하고 마음이 뒤숭숭하다”며 “방치되고 버려졌지만 오히려 생명력을 갖는 미륵을 보면서 이렇게 엉망진창인 세상에서 어떻게 나를 방치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제도권 미술을 통해 내 얘기를 한다면 그게 미술”
이쯤되면 세 사람이 생태나 환경에 대한 윤리적 이야기를 하는 예술가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작품이 어떤 메시지를 만들어 사람들을 계도하려는 움직임을 경계한다. 조지은은 “미륵을 통해 우리가 포함된 풍경이 얼마나 생태적이지 않은 풍경인가를 다시 보게 되겠지만 생태 자체가 주제는 아니다”라며 “예술은 정답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예술가의 할 일은 모순에 대한 고민을 꺼내고 그 고민을 우리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을 처음 접하면 ‘이 작품이 왜 미술이지’라며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이러한 작업도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조지은은 “미술 제도를 통해 얘기하면 예술인 것”이라는 현답을 내놓았다. 제도권 미술계가 전시를 하고 그들이 꺼내 놓은 이야기에 대해 고민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이끼바위쿠르르는 동시대 어떤 예술가보다도 예술가라고 불려야 마땅하다. 그들은 독일 카셀에서 5년마다 열리는 현대미술제 ‘도큐멘타 15’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한국 팀이다. 2021년 결성돼 업력이 짧지만 2023년 제14회 광주비엔날레(2023), 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2023), 식민지역사박물관(2023), 해머미술관(2024), 비엔나 제체시온(2024) 등 권위 있는 전시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