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체제’로 불리는 제9차 개정 헌법이 공포된 지 올해로 38년이 흘렀다. 40년 가까이 헌법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대통령 3명이 국회의 탄핵소추에 직면하자 개헌 모멘텀은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지만 제7공화국 출범은 난제가 많아 험난할 것으로 전망된다.
45년 만의 비상계엄이 촉발한 정국 혼란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손볼 권력 구조 개편 등 개헌 논의에 힘을 싣고 있다. 아울러 국민의 기본권 등 21세기에 걸맞은 시대정신도 헌법에 반영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산업화와 정보화 시대를 넘어 인공지능(AI) 시대도 아우르는 개헌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낸 박광온 일곱번째나라LAB 대표는 “개헌을 통해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질적 성장을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개헌의 역사를 돌아보면 이승만 정부의 발췌 개헌(1차)과 사사오입 개헌(2차), 박정희 정부의 3선 개헌(6차) 등 정권 연장의 도구로 악용된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현행 제6공화국 헌법(9차)은 민주화 투쟁으로 군정을 종식하며 국민이 대통령 선출 권한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는다. 제헌 국회 이후 최초의 여야 합의에 따른 개헌이기도 했다.
하지만 5년 단임 대통령은 정권마다 절대 권력과 레임덕을 오가며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개헌 시도는 정권마다 있기는 했다. 김대중 정부는 내각제를 공약으로 내걸고 출범했으나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의 분열로 백지화됐고 노무현 정부의 4년 연임 ‘원포인트’ 개헌은 야당 반대에 무산됐다.
박근혜 정부도 국정 농단 의혹으로 위기에 봉착하자 개헌 카드를 꺼내기는 했지만 한계는 분명했다. 문재인 정부가 이례적으로 정권 초반인 2018년 3월 △대통령 4년 연임제 △기본권 및 국민주권 확대 △지방자치 강화 등을 핵심으로 개헌안을 제시했지만 야당의 반대 속 집권당의 의지도 약해 역시 불발됐다.
22대 국회 들어선 우원식 국회의장이 ‘국민 미래 개헌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개헌 공론화에 나서고는 있다. 우 의장은 “저출생·고령화, 양극화, 디지털·AI 발전, 기후위기 등 격변의 시기에 새로운 헌법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다음 단계로 전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개헌 필요성은 폭발하지만 논의가 지속 가능할지에 대한 우려는 여전하다. 개헌안 통과를 위해서는 국회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국민적 공감대가 중요하다. 그러나 여야는 개헌에 따른 정치적 이해득실이 극명하게 달라 입장이 다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지난 대선 때 개헌을 공약하기도 했지만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가 된 지금은 개헌 논의에서 발을 빼고 있다. 반면 개헌에 소극적이던 국민의힘은 탄핵 정국에서 개헌에 힘을 싣고 있지만 내부에서도 이견이 적지 않다.
제도적인 절차도 미비하다. 개헌에 앞서 재외국민의 국민투표권 행사를 제외하는 법 조항 개정이 필요한데 2014년 헌법재판소의 헌법 불합치 판정 이후 개정 시한인 2015년이 지난 현재까지 개정 논의는 진척되지 못했다. 정치권과 헌법학자들 사이에서 선호도가 높은 ‘내각제 개헌’의 경우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높아 공론화마저 쉽지 않은 형국이다.
일각에서는 권력 구조 개편을 위한 ‘원포인트’ 개헌이라도 하자는 목소리도 있지만 전문 수정 등 추가 개헌을 하려면 또 한번 국민적 동력을 끌어올려야 해 한번에 제대로 된 개헌을 해야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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