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등 적대국에 대한 첨단기술 수출을 제한하려는 조 바이든 행정부의 퇴임 막바지 정책들이 외려 미국 기업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수출제한 국가를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설정하는가 하면 규제 목록에 오른 중국 기업과 거래해온 미국 투자은행(IB)들까지 영향권에 들게 되면서다. 규제 대상인 기업 및 국가뿐 아니라 미국 기업들도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가운데 퇴임이 임박한 대통령이 업계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의사 결정을 내리는 것은 도를 넘어섰다는 날 선 비판도 쏟아진다.
9일(현지 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미국 실리콘밸리 거대 기술기업(빅테크)들은 바이든 행정부가 10일 발표할 것으로 알려진 새로운 반도체 수출통제에 반발하고 있다. 새 규제는 전 세계 국가들을 3개 등급으로 나눠 우방국에는 미국산 인공지능(AI) 반도체를 제한 없이 구매하도록 하고 적대국에는 구입을 사실상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우방국은 한국·일본·대만 등 아시아 동맹과 영국·프랑스·독일 등 18개국으로 한정된다. 120여 곳에 이르는 미국산 반도체 수출 국가가 앞으로는 규제 대상에 들어가는 셈이다. 기술 업계는 정부의 이런 조치가 매출에 큰 타격을 줄 뿐 아니라 사업 성장 둔화, 기술 지배력 약화 등의 부정적 영향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국가에 미국산 반도체를 사지 못하게 하면 결국 중국산 AI 반도체를 구매할 수밖에 없고, 이는 중국 AI 산업의 성장을 미국이 도와주는 꼴이 된다는 주장이다. 실제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빅테크를 대표하는 정부기술산업위원회(ITIC)는 바이든 행정부가 기업들과 협의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기술기업들은 이달 20일 출범하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에 해당 정책을 수정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앞서 세계 최대 배터리 기업이자 테슬라의 핵심 배터리 공급처인 중국 CATL과 소셜미디어 ‘위챗’의 운영사인 텐센트 등을 국방부 ‘블랙리스트(중국 군사 기업)’에 추가하기로 한 결정도 반발을 사고 있다. 미 IB들은 이런 조치가 중국 유망 기업에 대한 투자를 제한하고 손실을 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일례로 텐센트는 미국 IB의 핵심 중국 고객 중 한 곳이다. 런던증권거래소그룹(LSEG)의 통계에 따르면 텐센트그룹은 2004년부터 2023년까지 20여 년간 5억 2400만 달러(약 7660억 원)의 IB 수수료를 냈다. 모건스탠리와 뱅크오브아메리카(BofA), 골드만삭스, 씨티그룹 등이 가장 큰 혜택을 입었다. CATL의 경우 이달 17일 주주총회를 기점으로 본격화할 예정이었던 홍콩 증시에서의 2차 상장 일정이 꼬일 가능성이 점쳐진다. 골드만삭스·JP모건 등 굵직한 IB가 지분 인수에 관심을 보였지만 텐센트가 ‘중국 군사 기업’ 명단에 포함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유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미 컨설팅 업체 더아시아그룹의 중국책임자 한셴린은 “고객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무작위로 등장하는 것이 은행 업무의 위험을 가중시키고 있다”며 “은행이 할 수 있는 일은 상황에 따라 비즈니스와 고객 조합을 재조정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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