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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삶의 무게…꿈 잃은 아버지의 쓸쓸한 최후 [리뷰]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보험금도 못내는 형편, 아들과 갈등

잘 나가던 시절 회상…슬픔 더해

'가장' 윌리役 맡은 거장 박근형

해맑음·혼란 오가는 열연 선봬

9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진행한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윌리 역의 박근형 배우가 양손에 캐리어를 든 채 비척비척 걸어가고 있다, /사진 제공=폼폼그라운드




양손에 팔 물건의 샘플이 가득 담긴 캐리어를 들고 왼쪽 어깨가 처진 채 비척비척 걸어와 현관 앞 계단을 오르는 한 가장이 있다. 걸음걸이만으로 그가 어떤 하루를 보냈을지 짐작이 갈 것도 같다. 그는 이 가정의 가장인 ‘윌리’다.

지난 7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에서 막을 올린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은 인물들의 처진 어깨를 보게 하는 작품이다. 거장 박근형 배우가 열연을 펼친 ‘윌리’의 가정은 모두가 약간의 ‘버블’ 속에서 살아간다. 서로를 불편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상황을 ‘적당히’ 좋게 포장한다. 하지만 뒷모습은 거짓말을 못 한다. 무심코 등을 돌렸을 때 보이는 처진 어깨는 말과 다른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등을 보는 대신 차라리 고개를 돌리고 만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을 살아가는 ‘윌리’는 현실에서 끝없이 과거를 회상하는 인물이다. 자신의 큰 아들인 ‘비프’가 고등학교 시절 최고의 미식축구 주장으로 명성을 날리며 마치 젊은 신 ‘헤라클레스’처럼 후광이 비치던 때를 끊임 없이 떠올린다. 동시에 늘 마음의 깊은 곳에서는 ‘아들을 잘 못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있지만 이를 회피한다. 아들이 공을 훔쳐왔을 때도, 수학에서 낙제를 받을 위기 속에서도 인기 있고 매력있기만 하면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그는 사실 불안하다.

/사진 제공=폼폼그라운드




어느 순간 그의 삶은 끝없이 지루한 ‘소모전’의 양상을 띈다. 세일즈맨으로서 모든 능력을 잃었고 수습 사원보다 못한 처지로 기본급 없이 판매 수수료로만 생활해야 한다. 아직도 25년 간의 주택 담보 대출금이 남아있고 보험료도 계속 밀려있다. 아들들도 말한다. “아빠는 세일즈를 할 때보다 집 앞 계단에 더 많은 흔적을 남겼어.” 하지만 그에게는 34살이 되도록 제대로 직업도 갖지 못하고 이 일 저 일 전전하는 아들 비프가 있다. 아들을 타박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가 잘못된 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다.

보험료는 그에게 가장으로서의 마지막 희망이다. 늘 앙숙 같은 친구이자 이웃 찰리는 자기 밑에서 주당 50달러라도 받으며 일할 것을 권하지만 윌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밀린 보험료를 내기 위해 찰리에게 돈을 빌리러 가서 자조적으로 내뱉는다. “참 웃기지. 그렇게 오래 기차 여행, 고속도로 여행을 하면서 버텨왔는데 사는 게 죽는 것보다 가치 없는 인생이 됐어.” 늘 ‘밥 맛 없어’라고 면박 주던 찰리에게 윌리는 처음으로 “자네가 내 유일한 친구야”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은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이상윤 배우가 열연한 아들 비프가 윌리(오른쪽)에게 자신의 속사정을 털어놓고 있다. 윌리는 계속 이를 부인하며 회피한다. /사진 제공=폼폼그라운드


클라이맥스는 아들 비프가 “저는 한 번도 시간당 1달러짜리 인생을 벗어난 적이 없었어요”라며 아버지를 마구 흔들어 오열하는 장면이다. 충격을 받은 듯한 윌리는 뜻밖의 말을 한다. “그 애가 나를 좋아해. 나 때문에 울었다고.” 어린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늘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는 형님에게 이를 털어놓는 마지막 모습은 가슴이 아리다. 마지막 길을 떠나면서도 아들에게 혼잣말로 당부를 잊지 않는 그의 얼굴은 즐거움에 차있다. 보험금 2만 달러가 자신의 아들에게 다시 헤라클레스의 후광을 입혀줄 것이라 믿는다.

이윽고 무대 높이 열린 관이 떠있다. 가족과 친구 찰리 외에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장례식이다. 친구 찰리는 말한다. “세일즈맨은 꿈을 꾸며 살아. 꿈을 파는 거야. 아무도 윌리를 비난할 수 없어.” 지금까지 무던하고 착한 아내로 일관했던 ‘린다’ 역의 예수정 배우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 부르짖는다. “이제 빚진 것도 없이 자유로운데 자유롭다고요… 자유, 자유.” 이 말은 메아리가 되어 자유보다 책임이, 현실보다 꿈이 세상과의 무게추 역할을 하던 한 가장 윌리를 넘어 우리 모두에게 닿았다. 해맑음과 혼란을 오가는 거장 박근형의 연기에 3시간 내내 몰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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