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20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을 떠났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리기 몇 시간 전인 이른 아침이었다. 이날 오전 8시 40분께 미 방송 CNN은 아침 일찍 백악관을 떠난 트럼프 대통령이 앤드루스 공군기지 활주로에서 환송식을 갖고 고별 연설하는 장면을 보도했다. 후임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는 미국 대통령은 1869년 앤드루 존슨 이후 처음이다. 대통령으로서 트럼프가 남긴 마지막 말은 “조만간 다시 보자(We will see you soon)”였다.
4년 만에 그가 돌아왔다. 제47대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에게 선거인단 투표에서 312대226으로 압승을 거뒀다. 7개 경합주에서 모두 이겼고 50.4%(7487만 표) 득표율을 기록했다. 상·하원은 물론 사법 권력까지 장악했다. 트럼프는 더욱 강해졌고 한층 노련해졌으며 훨씬 정교해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과 함께 세계는 냉전 이후 가장 위험한 상태에 직면할 것”이라고 짚었다. 고립주의와 보호무역주의로 무장한 트럼프가 취임하면 무질서가 일상화할 것이라는 진단에서다.
트럼프 취임이 닷새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트럼프 스톰’은 예상보다 훨씬 강하게 동맹국들을 강타하고 있다. 트럼프는 핵심 동맹과 우방국들을 겨냥해 경제적 패권은 물론 ‘불가침 영역’으로 간주되는 영토와 주권에 대한 침해 가능성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멕시코만’이라는 이름을 ‘미국만’으로 바꾸겠다고 했고 그린란드와 파나마 운하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으며 목적 달성을 위해 ‘군사력 옵션’을 배제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근간에 ‘팽창주의’가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내에서는 과거 ‘먼로 독트린’을 빗대 ‘돈로(도널드와 먼로를 합친 말) 독트린’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미국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가 1823년 먼로 독트린을 통해 유럽에 대한 간섭을 거부하며 중남미에 대한 미국의 패권을 추구했던 것을 일컫는 것이다.
‘트럼프 스톰’이 예상 가능한 경로를 번번이 이탈하면서 전 세계가 전전긍긍하고 있다. 답답한 것은 이런 중차대한 시점에 한국의 정치 리더십은 사실상 부재 상태라는 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그간 한일 관계 개선, 한미일 협력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면서 미국과 보조를 맞췄다. 하지만 12·3 계엄 사태 이후 외교·안보 및 경제 이슈는 탄핵 정국에 묻혀 소멸되다시피 했다.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이 되겠다’던 대통령에게는 나라를 내팽개치고 자폭했다는 비난이 쏟아졌고 여야 정치권은 국가의 안정보다 정치적 득실만 앞세우고 있다. 그러는 사이 국익은 훼손되고 국격은 추락 중이다. “지금은 정치적 야망을 추구할 때가 아니다”라는 한국계 연방 상원의원 앤디 김의 일침이 따갑다.
둘로 쪼개진 광장에서 터져 나오는 악다구니는 심리적 내전 상태가 실질적 내전으로 치닫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키운다. 양 진영에서 동원한 광장의 무리들은 서로를 향해 증오와 저주를 퍼붓는 것으로 모자라 “사형” “폭도” 등 섬뜩한 단어로 피칠갑을 하며 인민재판을 방불하게 하고 있다. 서로를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으니 건강한 비판과 현실적인 대안은 설 자리가 없다. 갑자기 훅 들어올 트럼프식 어퍼컷에 분노의 임계점에 도달한 대한민국이 맥없이 무너지지 않을지 실존적 위기감마저 밀려온다.
국제 사회는 한국이 비상한 시기에 맞닥뜨린 정치적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지, 사분오열된 국론을 어떻게 통합할지 예의 주시하고 있다. 당장은 트럼프 취임식을 전후해 가용한 외교·안보 라인과 재계 등 민간의 역량을 집중해 총력 외교를 펼쳐야 한다. 다양한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한미 동맹 강화가 궁극적으로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며 양국 번영의 초석”이라는 사실을 미국 측에 인식시켜야 한다. 조선이나 원자력발전 등 산업 협력 분야를 중심으로 정지 작업을 벌이면서 리더십 공백을 메울 때까지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국익만큼은 여야가 없어야 하고, 정쟁은 국경에서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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