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천 아래에 누군가 숨어있다. 숨어있는 이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혹은 어린아이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하지만 상상은 가능하다. 그림 속 두 인물은 커다란 캔버스를 들고 우아하게 춤을 추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두 사람은 위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비틀어진 캔버스로 받아내며 밀고 당기는 춤을 춘다. 하나의 그림에서 이처럼 기승전결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이유는 작가가 능수능란하게 빛을 사용해 그림 속 인물들을 마치 환영의 존재처럼 보이게 만들고, 그들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담아낸 덕분이다.
신비롭지만 구체적인 이같은 그림을 그린 작가는 독일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데이비드 오케인(David O’Kane)이다.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갤러리 바톤은 17일부터 데이비드 오케인의 개인전 ‘자아의 교향곡’을 개최한다.
그는 벨라스케스부터 렘브란트, 프란시스 베이컨에 이르는 미술사적 거장들의 작품을 참고 삼아 미지의 인물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한다. 이번에 국내에서 선보이는 신작을 통해 작가는 자신이 설정한 환영의 영향 아래에 놓였던 내면의 삶을 보여준다. 커다란 천 아래 숨어 있는 인물은 환영 아래 있는 누군가의 내면의 모습인 셈이다.
데이비드 오케인은 특히 빛을 다루는 데 능숙하다. 그가 다루는 인물들은 공상적이며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데, 이는 그가 어딘가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을 통해 인물의 신체 일부만을 넌지시 형상만 보이게 표현한 덕분이다.
관객들은 황혼과 여명 사이 간신히 보이는 빛 속에서만 존재하는 상상의 내면 세계로 초대 받는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상상하고 추론한다. 각 작품은 사각형의 캔버스 안에 담겨져 있지만 작가는 단일한 해석을 거부한다. 작품 속 인물의 모습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환영의 존재처럼 그들의 이야기는 각각 다르게 해석돼야 마땅하다.
데이비드 오케인은 1985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현재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다. 신(新) 라이프치히 화파를 이끈 네오 라우흐로부터 사사를 받았다. 2014년 아일랜드의 권위있는 미술상 골든 플리스 어워드를 수상했으며 베를린 슈타르케 재단과 데릭 힐 파운데이션 레지던시에 선정되기도 했다. 오케인의 작품은 부산시립미술관, 독일 쿤스트할레 슈파카세 라이프치히, 영국 자블루도비치 컬렉션, 아일랜드 캡 파운데이션, 푸에르토리코 트라파가-포날레다스 컬렉션 등이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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